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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진보라면, 참 학력 조급증을 버려라!


... 편집부 (2016-05-01 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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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원의 시선 4>
참 진보라면, 참 학력 조급증을 버려라!

“참 학력은 옳지만, 조급증은 전북교육의 기초학력 문제만 깊게 해”
“컨트롤 타워로서 교육청, 교사의 비판적 사고능력, 지역유관시설 구축 위해 애써야”
“참 진보의 기준은 사람 사는 세상을 열 수 있는 문제해결능력에 달려있어”


지금 전북교육청은 교육관을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집단과 조직이 정책의 터전인 ‘프레임’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교육정책의 지향점, 정당성, 평가의 타당성 및 신뢰성을 위해서라도 교육과정, 수업, 평가의 방향을 보여줘야만 한다.

참 학력은 전북교육청의 교육방향을 보여주는 프레임이다. 몇 년 전부터 혁신교육을 추진했지만 전북의 현실에 맞는 이론적 토대가 부족했고 이를 뒷받침하려는 세계관이 참 학력이다.

전북교육청은 참 학력을 기존의 학력과 다르다고 하면서 “지식위주의 학력을 넘어서서 지식, 태도, 실천이 조화를 이루어 미래를 살아갈 역량을 기르는 학력이다”고 규정한다. 즉 ‘지식을 지양하고 역량을 지향하는 학력’이다. 지식은 실생활에 유용한 것도 있고 유용하지 않는 것도 있는데 유용하지 않는 것들은 버리고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학력이라는 뜻이다.

기존의 학력과 구분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하지만 참이라는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기존의 학력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던 삶의 지식이나 기술은 ‘거짓’이었고 지금 전북교육청이 추진하는 학력관만이 ‘참’이라고 한다. 즉 ‘진짜 지식인 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참’이라는 표현은 신중해야 한다. 지금껏, 지금도 전라북도 각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수업에 헌신하셨고 애쓰시는 수많은 교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참(진리)을 강조하는 물음이나 지식을 가장 거짓된 것이라고 했다. 즉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언어의 환상에 속지 말라고 했다. 진리란 무엇인가? 라고 묻거나 이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권력의지라고 했다.

권력은 ‘정치권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자가 되기 위한 무의식적인 힘’이다. 또한 진리는 없으며 ‘권력의지’와 관련된 ‘진리의지’만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자랑거리인 ‘이성’은 권력의지의 수단에 불과하다.

현대사상은 확고한 진리를 의심한다. 과학자들도 ‘참’이라는 표현에 신중하다. 객관적인 법칙을 추구하는 과학자들조차도 과학적 진리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더구나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여러 사상들이 인류를 비참한 지옥으로 빠뜨리거나 대중을 조작한 것은 비일비재하다.

모택동이 유소기와 등소평을 수정주의자로 모는 것에 대해 문화대혁명을 지지했던 어떤 홍위병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강제노역을 시키면서 자신의 이론만이 진리(참)이며 역사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실은 참혹했다.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실패했고, 공업을 중시하고 전문가를 중시하는 유소기와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이 대중의 지지를 받자 그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즉 모택동에게 진리(의지)는 인간의 삶을 더 좋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지)적 수단에 불과했다.

‘참’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확실하고 보편타당한 지식도 의심받는데 전북교육청의 교육관으로서 실험적인 이론적 체계를 ‘참’이라고 정하는 것은 의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정치적 선전’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참 학력은 ‘authentic learning’ 이라고 한다. ‘authentic’은 ‘실제적인, 고유한, 진실인’이라는 뜻이다. 전북교육청은 그 의미를 ‘시험용이 아닌 실제’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적 근거가 부족한 자의적 해석이다. ‘authentic’은 고전적으로 합리적이며 완전하다는 것으로 ‘가짜’에 대응하는 진품으로서 ‘진짜’라는 뜻이다.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서 ‘authentic’이라고 할 수 있다.

‘authentic’은 실용적인 의미보다는 규범적이고 가치적으로 지식의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할 것이라면 ‘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육목표에 있어서도 기존의 학력관과 다른 측면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역사는 현재’라는 역사성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프레임을 구성하는 교육과정, 수업, 평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교육과정은 교육목표를 이루기 위한 교육내용과 학습활동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 몸의 척추에 해당한다. 척추가 직립의 기준이듯이 참 학력의 근간을 교육과정이 보여주는데 참 학력은 교과서 중심을 지양하고 성취기준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겠다고 한다.

교과서 중심을 지양하자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기존 교과서의 내용이 모두 또는 일부가 옳지 않다는 것이거나, 학생들의 지적수준이 다양하기 때문에 교과서의 지식을 획일적으로 전달하지 않겠다거나, 각 학생들이 처한 현실의 삶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극단적으로 이해하면 교과서를 버리겠다는 것이다.

헤겔(G.W.F Hegel)에 의하면 ‘지양(止揚, Aufheben)’은 더 나은 상태로 가기 위한 부정이니, 그르다고만 할 수 없다. 교과서는 교육과정의 구체적인 사례로서 교과서가 교육과정의 전부를 보여주지 못하기에 교과서를 대신할 더 나은 지식이나 활동이 있으면 꼭 가르치거나 배울 필요는 없다.

교과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지양하려면 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의도하지 않은 나쁜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성서에 의하면 밭에 뿌려진 한 알의 밀알이 썩는 것은 옳다. 새로운 생명체가 나와서 더 많은 작물을 거두게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씨앗을 뿌려야 하고 토질과 기후 등의 자연적인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귀중한 씨앗을 쓸모없게 하지 않으려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교과서를 지양하려면 지금의 교과서는 좋은 씨앗인가? 교과서를 대신할 대안이 있는가? 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현재 교과서는 검인정 교과서인데 파시스트인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을 지지하거나 반역사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즉 국가가 의도하는 반인간적인 정치적 가치를 주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박근혜 수구정권의 한국사 국정화에 대한 국민의 저항에서 보듯이 진실을 찾고 지키려는 국민들도 많다.

교과서 중심을 지양하는 것 자체는 성급할 수 있다. 더구나 교과서를 제외한 다른 대안이 뚜렷하지 않는데 교과서에 의존하는 것은 현실적이기도 하다. 교과서는 그 사회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을 설명하는 것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로서 헌법에서 정한 국민의 교육권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육과정의 기준은 교과서의 내용이지 교과서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교과서를 지양할 수 있지만 대안이 없고 교과서가 정의로운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교과서의 재구성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 성취기준 중심으로 교과서를 재구성하겠다는 것도 시간적 여유를 갖고 공론화가 필요하다.

“분절적 지식을 지양하고 통합교육과정을 추구하겠다”고 한다. 통합교육과정은 학습자 중심의 교육과정으로 각자의 경험이 연속적이고 다르기 때문에 각 교과를 세분화하지 말고 교과를 횡적으로 통합시켜 학습하자는 것이다. 그 경우에만 문제해결능력을 키울 수 있다. 이를 위해 각 지식을 통합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고 배우자는 것이다. 가령 ‘토론 및 논술적 교육과정’을 들 수 있다.

통합교육과정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지금 전북의 참 학력에서 거론되는 통합교육과정에 온전하게 박수를 칠 수 없는 것은 제대로 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통합교육과정은 긍정보다 부정의 측면이 강하다. 특히 초등에서 실시하는 통합교육과정은 심각한 기초학력의 저하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각 교과나 단원에서 다루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데 충분한 개념정립이 되어있지 않다.

‘개념은 추상적인 지식’으로 구체적인 것들의 공통점을 드러내는 것인데 다양한 경험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초등학생들에게는 ‘과일 보다는 사과, 배, 감의 뜻을 잘 가르치고 이해하는 수업’이 더욱 중요하다.

지적성장이 늦은 학생들에게 섣부르게 통합교육과정으로 수업할 경우에 대충대충 지식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고등지식을 습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력저하가 나타날 가능성도 크다. 언어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모든 지식은 뚜렷하고 분명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할 때만이 사실적”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지식은 현실을 왜곡하고 조작한다”고 했다.

기초학력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어떤 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많은 지식을 배워야 하고 지적 혼란을 겪기 때문이다. 더 나쁜 것은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교육적으로 차별받는 학생들이 생기는 것이다.

사과의 뜻도 잘 모르면서 과일, 식물, 생물을 배우니까 혼란스러워진 것이며 그 상태에서는 어떤 교과나 단원간의 연관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초등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령 사과의 뜻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것이고 이후 중등과 고등의 과정에서 과일을 학습하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모든 지식은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이 있는데 쉬운 것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려운 것들을 제대로 학습할 수 없다.

게다가 전라북도 교육현장에 통합교과를 다룰 수 있는 논리적 사고능력을 갖춘 교사나 교수학습과정, 지도안 등의 ‘교육인프라’가 어느 정도 구축되어 있는가도 의심스럽다.

참 학력관은 수업에 대해서 “학생이 배움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배움이 삶과 연결 짓는 수업을 하자”고 한다. 배움을 삶과 연결 짓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수업은 학생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사와 학생이 모두 주체로서 함께 하는 것이 수업이다.

물론 그 배경을 이해한다. 학생을 배제하는 일방적인 수업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의도도 알고 공감한다. 하지만 문제해결방식이 학생만을 주체라고 정하는 것은 오직 수요자만을 위해서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시장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같다. 시장은 수요자와 공급자간의 관계에 의해 균형과 조화적 관계로 유지되는 것이지 수요자의 입장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사를 보조자로 취급하는 것은 수요자 중심의 시장경제의 구조적 문제인 빈부격차와 차별을 반복하는 것이다. 즉 수요자가 원하는 상품만을 생산할 경우에 공익적 상품을 생산하지 못할 수 있다. 즉 교육차별을 받고 있는 학생이 학교와 사회가 요구하는 기초지식을 배우지 못하는 역선택(逆選擇)의 가능성이 크다.

“지식암기의 수업에서 생각 나눔의 수업을 하자”고 한다. 질문, 대화, 토의, 토론 등 협력적 배움이 있는 수업을 하자고 한다. 지식축적의 수업을 하지 말고 응용과 실천에 바탕을 둬서 수업하자고 한다. 즉 비판적으로 지식을 탐구하고 이론중심보다는 실천중심의 수업을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지식과 비판은 함께 있는 것이고 이론과 실천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설득력이 부족하다.

가장 위험한 것은 비판적 사고가 따라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생각 나눔이나 이론적 결핍이 있는 응용과 실천은 ‘군중적 인간’을 양성할 뿐이지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다중적 인간’을 만들지 못한다. 준비없이 조급하게 이루어지는 수업은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맹목적인 위험만 가져온다.

평가에 대해서도 “수업과 연계되어 성장을 돕는 다양한 평가를 하자”고 한다. 구체적으로 ‘고등사고력’을 지향한다고 한다. 고등사고력은 “비판적 사고로 분석력, 비판력, 종합력, 문제해결력을 의미한다.” 결과중심보다는 과정과 수행중심의 평가를 하자는 것이다. 지금 초등학교에서 시행중인 ‘성장평가제’는 이를 보여준다.

기존의 평가방식이 객관식 선다형의 단순지식, 결과를 검증하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평가는 ‘어떤 것의 수준과 질을 정하는 판단’으로 결과와 과정은 분리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분리되지 않았는데 분리된 것처럼 가르치고 배웠던 것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더구나 고등사고력을 지향한다면 지적으로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참 학력의 과정중심의 평가방식은 옳은 점이 많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전북교육에서 이러한 고등사고력이나 과정중심의 평가를 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있느냐는 것이다. 즉 전라북도의 교사들이 그 같은 능력을 갖고 있어서 자유자재로 수업과 평가에 활용할 수 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북교육청이 제대로 참 학력을 추진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과정과 수업과 평가에 관련된 인적자원을 갖추고 있냐는 것이다.

새로운 학력관에 대해 교사가 자율적으로 대응하라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자본가와 맞서고 있는 구매력이 없는 노동자에게 자유롭게 상품을 선택해서 소비하라는 ‘시장의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책임을 넘어서서 진짜 의도마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거듭 강조하지만 참 학력이 추구하는 목표나 의도는 좋다. 하지만 의도가 좋다고 결과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좋은 의도를 가졌지만 큰 재앙을 주었던 사건은 무수하다.

서구의 진보주의자 계보를 보면 진보주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의 귀결인 “문제해결능력”이다. 유럽좌파의 본류인 ‘사민주의’는 소비에트적인 허구적 이념을 부정하고 진보의 참 모습을 보여준다. 진짜 진보주의자는 아름다운 세계를 큰 소리로 외치지 않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고 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전북교육청이 추구하는 교육관의 명칭이나 목표는 중요하지 않다. 참 학력을 구현하기 위한 인적이고 물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교육감, 교육장, 장학사, 초중고 교사 그 누구든지 간에 자신의 양심과 하늘의 별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외치고 있는 참 학력이 지금의 전북교육상황에서 정말로 가능한 것이고, 역사적으로 정합적인가에 대해 순수하게 성찰해야 한다. 스스로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 박제원 선생님의 칼럼을 월1회 게재합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