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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환을 위한 변명


... 편집부 (2016-06-07 09: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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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원의 시선 5>
김승환을 위한 변명(The Apology for Kim Seung Hwan)

* 본 칼럼은 필자의 견해로서 본보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편집자).

“전교조 전임자 면직처리로 교육감에 대한 비판은 옳지 않아”
“진보인가, 아닌가는 시장에 대한 입장이 기준, 교육감은 교육의 상품화에 저항”
“정책에 대해 성찰하는 전북교육청이 되기를 간절하게 기대”

JTBC의 오후 2시 30분 뉴스프로그램인 ‘뉴스현장’이 있다. 오늘의 한마디라는 코너가 있는데 지난 5월 31일의 한마디는 ‘고등어가 기가 막혀’였다. 환경부가 지난 5월 23일 미세먼지 조사결과를 발표했는데 대책이라고 권고한 게 요리할 때 꼭 창문을 열라는 것에 대한 쓴 소리였다.

가장 가까운 86세대 대학 선배인 앵커 김종혁 대기자는 질타를 멈추지 않는다. “정부에 의하면 고등어, 삼겹살, 달걀프라이를 구워먹는 것이 미세먼지 발생의 주요원인으로 구워먹지 말라는 것인데 아니, 국민들이 갑자기 올 봄부터 삼시 세끼 고등어를 구워먹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노약자들은 마스크를 얼굴에 달고 사는 판에 그게 대책입니까. 중국 발 미세먼지는 원인의 절반이라는데, 그럼 나머지는 정확히 뭡니까. 그런 거 규명해서 대책 세우라고 환경부 있는 거 아닙니까. 가습기 살균제 때 환경부가 어떻게 했는지 요새 드러나고 있는데, 이번에도 국민들이 다 환자가 돼 봐야 그래야 정신 차릴 겁니까.”

지난 5월 20일 전북교육청은 학교복귀를 거부하고 있는 전교조 소속 3명의 교사 중에서 공립교사 2명에 대해 징계위원회에서 면직처분을 내렸다. 사립교사 1명에 대해서는 재단에 면직요청을 했다. 전북교육청의 조치에 대해 진보적인 일부 시민단체는 교육감을 ‘더 이상 진보가 아닌 진보의 배신자’로 규정하면서 비난했다. 어제까지도 우리 지역에서 수구적인 박 정권과 싸우는 진보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던 그는 하루아침에 수구꼴통이 되었다.

지금 쓰는 글은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기대어 교육감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다. BC 399년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神)들을 믿지 않고, 청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혐의로 멜레토스에 의해 고발되었으나, 그는 이에 대하여 당당한 변론을 시도하였다. 이 변론은 최초의 변론, 유죄선고 후의 변론, 사형선고 후의 변론의 세 부분으로 되었다.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진수(眞髓)로서, 또한 소크라테스의 고발·판결·사형의 관련을 밝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현재 전교조는 법외노조다. 법외노조는 노조법이 요구하는 조건을 갖추지 못해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조를 말한다. 법외노조가 되면 단체협약 교섭권, 노조전임자 파견권 등 노조로서의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아직 대법의 확정판결이 남아있지만 고등법원까지의 판결을 바탕으로 교육부의 강요에 의해 전북교육청이 전교조 전임자에 대해 면직처분을 한 것은 성급할 수 있지만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나 또한 수사적이 아니라 박근혜가 전교조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고 분노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교조와 시민단체 일부가 거의 같은 길을 가다가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서 교육감을 비난할 정도로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최근의 수구적인 대법원 판결에서 보듯이 전임자 문제에 대해서 전교조의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연한 대응이 아쉽기도 하다. 소모적 투쟁을 할 정도로 다급하거나 절박한 상황이라고 할 수 없는데 왜 이렇게 고집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법에서 법외노조가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오면 다시 전임의 업무를 하면 된다. 이러한 태도는 후퇴도 굴종도 아니며 수치도 아니다. 당장 전임자가 없다고 분명한 실체인 전교조가 사라지거나 전교조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다. 전임자에 대해서 해고처분을 한 것도 아니고 지금 법외노조이기 때문에 전임자들이 돌아가라고 한 것에 대해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대중적이라고 할 수 없다. 노동법상 부당노동행위하고도 다르다. 노조활동이 성가신데 해고는 시킬 수 없으니 자발적으로 그만두기를 기대하는 불법 전출도 아니다. 학교로 돌아가라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

교육감은 1심에서 법외노조 판결이 났을 때도 전교조의 실체를 인정하고 단체교섭의 대상자로 인정했다. 즉 단체교섭권을 갖는 정식노조처럼 대했다. 진짜 교육감이 수구적인 박 정권에 굴복해 전교조의 실체를 부정했다면 단체교섭권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교육감에게 책임을 묻는 일부 진보적 시민단체는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 우리의 도움으로 당신이 교육감이 되었는데 등을 돌렸다라고 하는 것은 더욱 설득력이 없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만하기까지 하다. 교육감을 지지했을지 몰라도 찬성표를 던진 것은 당신들만이 아니다. 당신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교육감에 대해 표를 던졌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법외노조의 논란이 있는 전교조에 대해 교육감의 태도는 할 만큼 했다. 전교조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모든 것을 걸고 전교조 전임자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면 좋겠지만 교육감은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래서도 되지 않는다. 지금 이 문제는 진보적 의제와 직접적이지 않으며 교육감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무책임한 처사이다. 진짜 교육감이 세간의 평가처럼 ‘진보의 아이콘’이라면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더구나 잘못된 교육정책이 있다면 좋은 방향으로 수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야 진보교육감으로 자격이 있다. 진보는 성찰에 있다.

지금 논란의 과정에서 반드시 짚어보고 갈 일이 있다. 도대체 진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어제까지 진보라는 교육감에 대해 오늘 진보가 아니라면 진보의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신문에 나온 기사만 보면, 전교조나 일부 시민단체의 입장에 동의하면 진보이고 동의하지 않으면 수구 꼴통이다. 기준이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동의할 수 있는가? 그들의 입장이 진보의 기준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가?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전교조와 일부 시민단체를 증오의 대상으로 여겨서가 아니다. 진보는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다운 삶을 더 많은 사람이 누려야 한다는 인간의 삶이자 역사이다. 그렇기에 동의할 수 없다.

즉 진보는 개념이다. 개념은 추상적인 것으로 그에 속하는 여러 종류를 갖지만 한 종류만이 진보라고 할 수 없다. 과일에는 사과, 배, 감, 포도 등이 있다. 과일은 진보이며 사과, 배, 감, 포도 등은 다양한 진보의 모양이다. 보수보다 진보의 스펙트럼이 넓고 여러 형태인 것은 진보는 정리된 완성된 이념체계가 아닌, 여전히 진행 중인 이념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그렇지 않다. 보수는 비교적 체계적인 도그마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보수주의자에 대한 판단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진보주의자에 대한 판단은 어렵고 시간적, 공간적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제의 기회주의자가 오늘의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도 진보에서만 있는 일이다. 사회민주주의의 창시자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베른슈타인은 그 당시에 수정주의자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칼 카우츠키’도 마찬가지이며 ‘로자 룩셈부르크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으로 보수주의자에 대한 평가는 한번 정해지면 거의 변하지 않지만 진보주의자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공통적인 것은 진보의 ’시장에 대한 입장‘이다. 시장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육감이 진보인가 아닌가에 대한 평가도 이에 기초해야 한다. 교육감은 교육시장을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진보의 원리에 어긋났는가? 그렇다면 교육감은 더 이상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도 정책적으로 설익고 오판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진보가 시장에 대한 규제를 정당화하듯이 교육의 상품화에 저항하고 있다.

전임자 처리에 대해 교육감을 수구꼴통으로 모는 것은 정치적 수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어제의 동지에 대한 예우도 아니다. 교육감도 전임자 처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비통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감의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외환위기 때 다국적 자본이 국내시장을 초토화 하는 것을 모르고 국제통화기금의 고금리정책과 노동시장의 유연화인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였겠는가?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국가부도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전교조와 일부 시민단체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그 문제로 진보적 가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국내 대기업 노조가 오랫동안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수수방관하면서 노동해방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과 비슷한 코미디에 가깝다. 진짜 교육감이 진보가 아니라면 정책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진보적인 교육정책인가, 실현가능한 것인가 등에 대해서 평가해야 한다.

그 정책이 비현실적이라면 충고하고, 진보적이지만 대중성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 속도를 늦춰가자고 해야 하고, 정책의 이론적 완결성을 위해서 좋은 전문가를 추천해 주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시민사회의 시민단체의 역할이다. 시민사회란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정책결정과정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이다.

물론 이러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배심원 판결에서 소크라테스에게 30표의 차이로 유죄를 선고했던 것처럼 교육감을 수구적으로 몰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진보적 싸움이 이렇게 되는 것은 옳지 않다. 전교조는 민주주의와 인간화의 역사를 갖는 우리의 교육 혼으로서 이제 장년이 되었다. 시민사회단체도 마찬가지이다. 적과의 싸움은 피터지게 하더라도 작은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면 진짜 인간다운 삶을 만들 것이라면 진보의 실체를 단단히 하고 유능하게 하고 권력적 대안으로 함께 가야 한다. 진보인가 아닌가는 정책과 정책의 집행과정에서 완성도에 있는 것이지 구호와 패거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어찌되었든 교육감에게 도덕적 자책은 있을지 모르지만 무죄이며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이 작은 변호는 교육감이 모든 것에서 옳다가 아니라 진보라는 아프고 시린 깃발이 평가 절하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진짜 좋은 교육청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어서이다. ‘국민생선 고등어까지 동원해서 정권을 유지하려는 처사에 고등어가 기가 막힌 것처럼 노상에서 입담으로 버려지는 진보가 기가 막히는 현실이 싫은 까닭이다.’

※ 박제원 선생님의 칼럼을 월1회 게재합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