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대(梨大) 나온 여자야”
- 박제원(전주 완산고등학교 경제교사·사진)
“박(朴)정권의 교육정책은 악(惡)”
“이화여대 학생들 학교를 되찾아”
“대중적 아젠다의 중요성 상기시켜 ”
“전북교육정책, 치졸한 박 정권에 맞대응보다는 내실로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해야 ”
2006년에 상영된 대중영화가 있다. 허영만 원작의 ‘따짜’이다. 원작이 성공했다고 모두 흥행에서 성공하지는 않지만 ‘따짜’는 원작을 넘어섰다. 개봉관 관객만 거의 700만에 달했다. 지금도 정 마담 역으로 출연한 영화배우 김혜수씨가 몽환적인 눈빛으로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라고 하던 말이 생생하다.
근 몇 주 동안 비다운 비도 오지 않고 사상 초유의 폭염이 길어지는데 시원한 소식이 들려왔다. 이화여대를 나왔거나 이화여대를 나올 여자들이 큰 것으로 한 건 했다. 교육부와 이화여대 총장 및 일부 측근과 보직교수들이 담합해서 은근슬쩍 해치우려던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을 취소시켰다.
미래 라이프 대학, 즉 평생교육 단과대학을 신설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대학에 가지 못하고 취업했던 고교졸업자나 재사회화의 과정을 밟고자 하는 30세 이상의 성인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국가가 지금보다 더욱 학교의 문을 활짝 열도록 하고 국민과 함께 하려는 것은 인간다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점에서 교육부의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취지를 그르다고만 할 수 없다. 더구나 국내의 많은 대학들이 미래라이프 사업과는 다르지만 오래전부터 같은 대학에서 소수 과목에 대해 학점취득을 인정하는 평생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이처럼 좋은 취지일 수 있지만 교육부나 이화여대는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단과대 설립 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한 이대생은 몇 백 명에 불과했고, 타 대학의 학생회나 시민사회단체의 지원을 거절했으며, 그토록 과격(?)하다고 지탄받는 거리시위 등을 하지 않았음에도 미래 라이프 대학 사업을 무산시켰다.
원초적으로 박근혜정권의 교육정책이 잘못된 탓이다. 박(朴)정권의 강압적 교육정책은 역대 어느 수구정권보다 못하지 않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물론 교육부가 대학의 운영에 개입하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 조직이나 운영의 자율성이 지나친 방만함으로 시장주의의 폐해를 가져올 경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간섭해야만 한다.
하지만 ‘결’이 다르다. 박 정권에게 대학은 시녀이다. 자신의 뜻과 명령에 의해서만 자유가 정해져야 한다. 조직의 대표자를 뽑는 방식, 학생을 선발하는 방식, 학사운영 방식 그 모든 것에 개입한다. 권력의 무기는 돈과 낮은 실업률이다. 불황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청년실업률이 높은 상황에서 돈과 취업에 유리할 것이라는 물신적 가치관으로 대학을 쥐고 흔들고 있다. 자신들의 독단적인 잣대로 평가하면서 지식의 차이를 차별하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권에게 구성원들과 소통하거나 대학의 가치에 대해 성찰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야기이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후마니타스(Humanitas)의 가치를 대학에서 찾는 것은 순진을 넘어서 무지에 가까운 현실이 되었다.
교육부의 정책은 일관성이 있다. 취업이라는 미명하에, 사고하지 못하는 청년을 양성하려고 한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천대하고 자연과학이나 공학이 최고의 가치라고 느끼며 자발적으로 수용하도록 몰아간다. 먹고 사는 것이 팍팍한 현실에 적응하는 삶이 우선이며 비판적 사고는 생존과 증식에 해를 주는 것이라고 암시한다. 고등학생들에게는 학생들의 끼와 자기 주도적 삶을 키운다는 공언(空言)으로, 비판적 사고를 배제한 학생부 전형을 확대하고 있다. 지금껏 반교육적(反敎育的) 행태를 자행해 온 새누리당이 당직자 회의와 발언을 통해 ‘학생부 종합전형’의 확대를 극찬한 것도 눈여겨 볼만한 일이다. 대학교수들에게는 싼 지식 떡을 대량으로 만들도록 강제하고 있다. 기능주의적 정책에는 물신으로서의 돈과 실업의 고통이 있다.
30억은 미끼치고는 구수하다. 초기자본인 30억으로 가게를 차려, 두고두고 이화여대라는 간판으로 수익을 낼 수 있으니 최 총장과 측근은 대박의 환상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박 정권의 교육부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소한 미끼 30억으로 국내 여대(女大) 중에서 최고의 브랜드를 갖는 이화여대를 잡았으니 희희낙락(喜喜樂樂) 하고 있었을 것이다. 축제가 있었다면 막춤을 추는 데도 바빴을 것이다. 그 무지한 것들이, 99%의 개, 돼지들이 지금껏 우리가 길들인 방식으로 따라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기대의 대가는 컸다. 전면취소였다. 오히려 총장은 사퇴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교육부는 최 총장 뒤에 숨어서 학교의 요구를 수용한 것뿐이며 강제도 강요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학교의 취소신청을 승인한다고 했다. 최 총장도 할 말이 많다. 자신의 입지를 공고하게 하려는 실적주의를 따른 것이지만 교육부가 멍석을 깔았으며 이명박 정권 이래로 관행처럼 해오던 일이었다. 더구나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학교를 개방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비난이 자신에게만 기우는 것은 억울할 수 있다.
거부 측에서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학내 구성원들의 의사결정과정을 거치지 않고 은밀하게 신청이 이루어졌다는 것과 학위수여의 공정성 논란이다. 즉 미래라이프 단과대 학생들에게도 동등한 자격의 학위가 수여되는데 다른 단과대에 비해 입학에서 졸업까지의 학사과정이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 대학의 구성원이 아닌 누구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대학의 학위가 갖는 상징성과 사회적 삶을 고려하면 불공정하고 비민주적이다.
이런 식으로 미래라이프 대학이 신설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소위 ‘프라임사업’이라고 하면서 뒷돈질을 해대며 대학의 인문, 사회계열 학과를 줄이고 이과와 공과대 학생을 늘리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기능적인 학과만 신설한다. 그 분야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더 큰 것도 아니며 이공계열 학생이 취업에서 더 좋은 기회를 갖는 것도 확증할 수 없는데 대세라고 몰아간다.
위험사회에서 본능적 생존의식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기본적 삶이 위태로운 경우에 인간의 이성은 날을 세우기 어렵다는 것을 정권적으로 악용하려고 한다. 본능은 이성을 압도하며 이성은 본능에 기여한다. 그 누구든 위반할 경우에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간은 본능적 방식으로만 살지 않았다. 공생적, 협동적 삶도 진화의 동력이었다. 고등동물에게서 발견되는 ‘거울신경세포’는 경쟁과 더불어 협동도 진화의 축이었음을 보여준다.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도 ‘이타적 협동’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이번 갈등의 결말은 경이롭다. 교육부의 지원을 받는 반인간적인 강제에 수 백 명의 잔다르크가 인간을 지켰다. 물론 이번 결과에 대해 이대생들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자신들만이 성골이며 진골이나 육두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끼리끼리 문화라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권장할 만한 선민의식이다. 칭찬할 만한 ‘끼리끼리’ 문화이다. 순혈주의 의도가 있어도 그 정도는 지적 살인을 자행하는 정권의 강제를 막은 것에 비하면 경범죄이다. 미래라이프 대학은 가치의 문제로서, 정서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정말, 박 정권이 교육의 폭넓은 기회를 위해 평생교육대학을 설립하려고 했다면 돈으로 학교를 지원하려고 하지 말고 재사회화에 대해 무상지원을 했어야 했고 교육부와 대학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자격평가수단을 찾았어야 한다. 최소한 재학기간을 똑같이 하고 평가와 학위수여 방식에는 더욱 엄격한 절차를 갖추도록 했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시행해오던 기능중심의 교육정책을 파기하고 학교의 본질을 고려했어야 한다. 우리는 현자(賢者)로서 정책을 정하고 너희들은 개, 돼지라 사고능력이 없으니 따르라고 하는 개, 돼지적인 발상을 멈춰야 한다. 기능중심, 물신주의 중심의 국가교육을 포기해야 한다.

▲이화여대 캠퍼스의 봄. 사진제공=이화여자대학교.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승리했냐는 것이다. 무엇이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공감을 불러일으켰냐는 것이다. 첫째, 비판과 참여다. 소수임을 알지만 그 상황이 나와 무관하지 않고 내가 그 상황의 당사자라는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참여자가 있었다. 둘째, 대중성이다.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형식적 비민주성을 최대한 부각시키면서도 대중성을 잊지 않았다. 강력한 외부의 도움에 기대기보다 대학의 본질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대학에 대한 기억을 시민과 동문들에게 호소했다. 자유, 정의, 진리의 깃발을 부여잡고 “학교만은, 대학만은 이래야 한다” 는 일상적 정서에 기대고 있었다. 상식에 호소하면서 학교다운 학교를 지키겠다고 했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대생과 동문들의 무기는 승리하기 위해 강력하게 여기는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 처세, 굴종과는 다른 상식, 대중성, 비판, 참여가 전부였다. 인간으로 살다 인간으로 죽고자 하는 본연의 사람다움이 전부였다.
지금 자행되는 박 정권의 압박은 전 방위적이다. 대학만이 아니다. 초중고 현장에서도 치열하다. 교육부의 정책을 수용하라고 강압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치졸한 수단으로 제재를 가한다. 교육감을 고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도 아니다. 치졸함을 넘어서 가엾기도 하다. 각 시도 교육청의 예산에 손을 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행하려는 정책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정권에 기여할 수 있느냐가 기준이다. 돈맛에 길들여진 인간들에게 돈 맛을 보여주겠다고 난리를 친 정책도 상당하다. 공교육 교사의 질을 올리고 사교육비를 줄인다고 했던 ‘교육역량강화사업’도 웃기는 일 중 하나다. 사교육비는 전혀 줄지 않았고 교사들의 질이 좋아졌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돈을 주고, 돈을 써야 하며 양적으로 더 많은 수업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적이라는 돈 맛의 허위의식을 확산시킨 것은 분명하다. 사드 배치와 같은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안에 대해 저희들만이 결정하고, 홍보하라고 공문을 내려 보내는 것이 교육부의 본질이다.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이런 치졸하고도 무자비한 박 정권의 교육정책에 어떻게 학교다움을 지킬 수 있냐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기업에서 배울 점이 있다. 그 동안의 경영방식을 반성하기 위해서 최고경영자는 현장을 본다. 샅샅이 보려고 한다. 그 기업을 진짜 살리려는 의지가 있는 경영자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 맞는 정책을 만들고 전달하려고 한다. 부족하지만 남아있는 모든 자원을 집중해서 현장을 지키려고 한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서구에서 위기에 처한 기업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기보다 현장을 지키려고 한 사례가 많다. 국내에서는 드물지만 지난 외환위기 때 유한킴벌리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치졸하고 무지한 정권에게 육두문자를 날릴 수 있지만 듣지 않는다. 그런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한 의사결정자들은 들을 수 있는 내적 역량이 없으며 오직 돈과 권력적 삶을 희구할 뿐이다. 금치산자(禁治産者)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육두문자도 해야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현장에서 답을 찾도록 해야 한다. 소수냐 다수냐가 아니라 학교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최적의 방법을 추구하고 키우려고 해야 한다. 학교가 상식적이고 비판적인 교사와 학생이 주인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화여대의 승리로부터 찾을 수 있는 배움이다. 독단을 자율로, 강압을 점진으로 위장하면서 곡학아세(曲學阿世), 감언이설(甘言利說), 밀실야합(密室野合)을 좋은 처세로 삼아 부당한 맛을 지키려는 무늬만 좌파나 우파 쟁이 들의 권력을 이기는 비책(祕策)이다. ‘우파’나 ‘좌파’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좌우인가를 따져야 한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대중적으로 공감하는 좋은 정책을 만들어서 대중에게 호소하고 인정받으려고 해야 한다.
기초학력 미달학생을 없애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안 검토, 교사가 감독하는 야간자율학습의 폐지, 방학 중에 이루어지는 방과 후 수업시간 총량제 실시, 저녁 7시 이후에 이루어지는 국어, 영어, 수학 객관식 중심의 심화수업 폐지, 진정한 수업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인 교수학습 배움 과정 개설, 성적 중심의 기숙사 운영 폐지, 온라인 중심의 연수제도 개선, 교장, 교감, 외부인에게 보여주기 식의 장학제도의 개선 등 사안은 무수하다.
이런 것들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전근대적이고 인간의 무지에 기대어 버텨왔던 오래된 관행일 뿐으로, 적폐(積弊)를 없앰으로써 진짜 진보와 보수가 격론하는 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짜 고급스러운 논쟁을 하고 서구유럽에서 보수당이 정권을 잡아도 보편적 복지가 지켜지는 진짜 멋진 대한민국에서 살자는 것이다.
유시민 작가와 전원책 변호사의 격론이 부딪치는 토론방송 ‘썰전’의 가치는 보수와 진보의 참모습을 볼 수 있어서이다. 공감(共感)과 이견(異見)이 교차하는 더 나은 세계로 가기 위한 진짜 토론을 볼 수 있어서이다. 역사는 전 시대의 적폐를 해소하는 과정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새로운 시대의 가치가 보편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전 시대의 적폐를 해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혁은 허구적이거나 성공하지 못했다. ‘제국주의론’과 ‘주변부자본주의론’에 기대어 성숙하지 못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수 있고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가능하다고 했던 그 어떤 이론도 오래 가지 못했으며 혁명에 성공했어도 지속할 수 없었다. 좋은 씨라도 나쁜 밭에서는 성장하지 못한다. 성장하는 척만 할 뿐이다. 전북교육청의 ‘초등성장평가제’나 ‘참학력’ 정책에 대해 우려하고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교사로서 작은 꿈이 있다면 타짜의 그녀처럼 관능적이지는 않지만 수줍고 은밀하게 “나 전북에서 교사이거나 교사한 사람이야”라고 고백하고 사는 정도이다. 지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부족한 역량을 잘 알기에 그 무엇을 꿈꾸지는 않는다. 다시 한 번 이대 후학들에게 존경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짝짝짝, 그대들은 해방이화(解放梨花)를 나올 것이고, 해방이화((解放梨花)나온 것 맞아!”
※ 박제원 선생님의 칼럼을 월1회 게재합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