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파장이 점점 커가고 있다. 여성계를 비롯한 시민사회가 ‘여성-인권’의 시각에서 이 사태에 주목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가 인권이고 인권이 여성의 권리”라는 지난 21일 여성행진의 구호를 새삼 떠올리고 있다.
인권영화제 자원봉사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입건돼 경찰수사를 받아오던 전북도 전모(50) 인권팀장(사무관)이 25일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전씨는 지난해 12월10일 오전1시께 인권영화제 뒷풀이 모임이 끝난후 전주시 완산구 한 모텔로 술에 만취한 여성 B씨를 차신의 차에 태워 따로 데려가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씨는 “합의하고 관계를 가졌다. 강제성은 없었다”고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전주완산경찰서는 폭행이나 협박이 없더라도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해 성폭행한 경우에 준강간죄가 성립한다며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전북도 감사관은 24일 경찰로부터 검찰송치 관련 공문을 받은 직후 인사위원회에 전씨를 ‘공무원 품위유지 위반’을 사유로 중징계 요구했고, 이어 열린 인사위원회는 전씨를 파면 결정했다.
한편 도내 여성단체들은 이 사건이 지역사회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인권활동가 출신 관료가 저지른 사건이라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해자로서 반성하지 않고 자신의 인적 자원을 동원해 억울함을 주장하는 태도에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일부 여성활동가들은 이대로라면 가해자가 법정까지 자신의 항변을 끌고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 피해와 고통은 고스란히 성폭행 피해여성에게 가해질 것이라는 게 여성활동가들의 경험에서 나온 얘기다.
25일 50개 여성단체가 제안해 전주 중부비전센터에서 개최된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와 대안 마련을 위한 집담회’도 그런 차원에서 열렸다. 40여명의 호남·제주 지역 여성활동가와 일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참가한 집담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1월25일 전주 중부비전센터에서 송경숙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장의 사회로 성폭력사건 논의와 대안마련을 위한 집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 여성활동가는 “가해자가 도리어 큰 소리를 치고 일부언론이 신중치 못한 보도를 하면서 이미 가해자에게 유리한 여론이 조성됐다”고 우려했다.
조혜진 민주노총전북본부 조직국장은 “이번 사건은 여타 성폭행사건과 차원이 다르고, 가해자와 그 주변이 대처하는 행태 또한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A단체가 이번 사건에 대한 일정한 책임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를 전북의 시민사회는 기대하고 있다"면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북의 시민사회는 A단체를 더 이상 인권단체로 인정할 수도 없고, 학생과 공무원 등 도민을 대상으로 인권교육을 계속하게 두는 것도 곤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시민사회 내부에 성폭력에 대해 맹목인 집단이 있다”며 “이들은 피해자에게 피해자가 아니라고 권력으로 억압하고 있다. 이 점을 그들 스스로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도 망가진다. 절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시민단체 활동가, 특히 그 안에서 권력 꽤나 갖고 있다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황지영 성폭력예방치료센터 성폭력상담소장은 ‘아는 사람의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통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특히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알지 못한 채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제를 계속 일으키고, 그 결과 성폭력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의 문제로 남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폭력은 가해자 개인에 대한 강제적 응징으로 근절될 수 없으며, 가해자를 양산하는 사회문화적 통념의 변화가 있을 때 근절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황 소장은 또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여성이 ‘동의’한 것 아니냐는 가해자입장의 시각이 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서 △신체적 접촉 이전에는 반드시 동의를 구해야 한다. △한 행동에 대한 동의가 다른 행동에 대한 동의는 아니다. △마음이 바뀌면 동의는 언제든 취소할 수 있어야 한다. △술에 취하는 등 동의를 취소할 능력을 잃었다면 그 순간부터는 ‘강간’이다 등 캐나다 여성운동가의 ‘동의의 원칙’을 소개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집담회 자리에서는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손주화 전북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국장은 “일부 언론은 피해자의 잘못된 처신으로 사건이 발생했다거나 피해자가 범죄에 빌미를 제공했다고 인식될 수 있는 보도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언론 또한 잘못된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성폭력 사건 보도에 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가이드라인이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함께 제정한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 한국기자협회가 제정한 ‘성폭력 사건 보도 가이드라인’과 ‘성폭력 사건 보도 실천요강’이 있다. 한국여성민우회의 ‘성폭력보도 가이드라인’(2012)은 그것들의 준거가 된 기준이다.
여성단체와 시민사회는 한편 이날 집담회에 이어 2차 시민사회 간담회를 제안하는 등 전북지역 언론과 시민사회단체, 인권단체의 여성인권과 성폭력 통념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해나가기로 했다.
집담회 제안 단체들은 앞서 지난 12일에는 기자회견도 가진 바 있다. 당시 단체들은 전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가해자인 인권팀장은 자신의 행위가 합의에 의해 발생했다고 항변하고 있다고 한다”면서 “가해자는 더 이상 침해당한 피해자의 인권에 대해서 어떠한 반성의 태도도 없이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합리화하는 발언과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