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른이나 아이나 잔소리는 지겨운 소리일 뿐 그것이 삶에 충고가 된다거나 생활방식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른은 버릇처럼 잔소리하고 아이들은 버릇처럼 귓등으로 잔소리를 흘려버린다. 나무라는 소리가 길어지면 잔소리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그것이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잊어버린 채.
아이들을 키우면서 잔소리를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공부해라”
“일찍 일어나라”
“게임 그만해라”
“일찍 다녀라”
나무라는 것도 한마디로 하면 간단한 대답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나무라는 것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반발심은 커지기 마련이다. 그뿐이던가 잘못된 잔소리는 상처를 주고 그 흔적은 오랫동안 아이들 가슴에 남아 있을 수 있다.
내 고등학교 시절.
버스로 1시간 걸리는 비포장도로를 통학했다. 나주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었기에 버스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특히 저녁 시간대에는 버스 한 대를 놓치면 한 시간 뒤에 있거나 먼 거리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종례가 늦게 끝났기에 터미널로 뛰어갔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버렸고 다음 버스가 막차였다. 터미널에서 한 시간 동안 추위를 견디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는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을 따라 구불거리며 한 시간을 달렸다. 자그만 면 소재지 정류소에 내렸다. 다시 걸어서 2km를 가야 했다. 어두운 밤길에 인기척은 없었다. 시골 길이었기에 가로등도 없었다. 가끔 보이는 집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고, 무서움은 극에 달했다. 지금은 사람이 무섭지만, 그때는 어둠이 무서웠다. 논길과 밭길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내 앞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가는 길에 지나치는 동네는 두 곳이었지만, 길가에 있는 마을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 마을을 지나면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내 앞을 걷는 이도 없었고 내 뒤에 따라오는 이도 없었다.
산길에 접어들기 전 대나무 숲을 지나야 했다. 대나무밭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신경은 곤두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 발걸음 따라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아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개울에 흐르는 물속에는 달은 빠져있었고, 달은 나를 따라오며 놀리기라도 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달렸다.
앞도 보지 않고 무작정 산길을 달렸다. 누군가 다리를 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리를 흔들어 뿌리치고 마을까지 200m 정도 남았기에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마을 창고 앞이 스산하다. 이장님이 태극기 내리는 것을 잊어버렸나 보다. 창고 앞 깃대에는 태극기와 새마을 기가 나란히 달빛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을입구에서 바라보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는 집이 우리 집이었다. 대문을 열었다. 잠겨 있었다. 집은 어둡고 음침했다. 분명 집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생과 부모님이 계신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가족이 있었지만, 대문은 잠겨 있었다. 나는 대문을 두들길 용기도 없었다.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높이가 있는 돌을 모았다. 돌을 딛고 벽돌담 위에 올라가 걸터앉았다. 일어서서 손을 뻗으면 은행나무 가지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무사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부엌에 딸린 자그만 내 방에 가방을 던져놓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배가 고팠다. 체육과 교련이 같이 들어있는 날은 배가 고팠다. 점심 도시락 한 끼로 하루를 버티기에는 혈기가 왕성한 나이였다. 부엌 불을 켜고 조심스럽게 솥뚜껑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오빠들이 있었기에 언제나 덮개가 있는 밥 한 공기 정도는 솥 안에 있었다. 혹시나 싶어 그릇 올려놓는 선반을 뒤적거렸다. 찬밥도 없었다. 부엌에 주저앉았다. 서글픈 마음으로 내 방문을 열 때였다.
“워매 써글년 어디서 뭔 지랄을 하다가 인자 기어 들어 왔다냐? 시방 시간이 몇 시여? 조금 있으믄 해 뜨것다잉! 가시낭년이 겁대가리 없이 어디를 싸돌아다니다가 인자 들어와서 시끄럽게 부엌에서 지랄이여. 들어가 조용히 잠이나 퍼자믄 되제!”
“차를 놓….”
“차를 놓쳤다고야? 내가 느그들한티 한 두 번 속았냐? 느그 둘째 오빠가 가시낭년들하고 놀다가 핑계 대는 것이 차 놓쳐서 늦었다고 그라드라. 옷에서는 튀김 냄시 펄펄 풍기믄서야!”
“진짜 차 놓쳤어요.”
“너도 느그 둘째 오빠랑 똑같은 년이랑 거 내가 모를깜시? 언능 들어가 잠이나 자!”
억울했다. 아니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어머니보다 항상 거짓말로 어머니를 속이고 늦게 다녔던 학교 선배이자 둘째 오빠가 더 미웠을지도 모르겠다. 억울함과 배고픔이 동시에 밀려 들었다. 추워서 씻기도 싫었고 부엌으로 또 나가면 목침이라도 날아올 것 같아 옷을 갈아입고 그대로 이불 속으로 발을 넣었다. 뭔가 발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수건에 똘똘 말아 이불 속에 넣어 둔 밥 한 그릇이었다.
살금살금 부엌으로 들어가서 김치 한 접시와 수저만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자그만 앉은뱅이책상에 김치와 밥을 올려놓고 꾸역꾸역 삼켰다. 목이 메 넘어가지 않았지만, 서러움보다 배고픔이 우선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부엌에 온기는 없었다. 밭에 나가신 것 같아 쌀을 씻어 아침밥을 대충해 두고 책가방 들고 뛰었다. 첫차를 놓치면 지각이었다. 오늘도 7교시에 자율학습 두 시간 하고 나면 차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아침도 먹지 못했고, 도시락도 싸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마주치는 것보다 그것이 마음은 더 편했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욕설 섞인 잔소리는 주말에 모두 들어야 했다. 토요일에 조금이라도 늦게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평일에 늦었던 일까지 모두 합쳐서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 내내 똑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야 했다. 지겨움에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토요일 오후에는 동네 상추 하우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어머니와 같이 움직여야 했다.
내 고등학교 시절을 답습하듯 가끔 딸아이가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통학의 지겨움 때문에 아이들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교를 보냈다. 그래서 버스 탈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늦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늦었는지가 중요했다.
어느 날
중학생이었던 딸아이가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와야 할 가족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 잠들 수 있는 엄마는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다. 그날은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딸아이가 올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오지 않았고 휴대전화는 꺼져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행여 나쁜 일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노심초사 걱정하는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자 정말 무슨 일이 생겼는데 집에서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몇 번 집 주변을 서성거렸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딸아이가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리 쉬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딸아이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화를 내고 싶었다. 아니 어머니께 내가 들었던 잔소리 그대로 내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몇 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걸어오는 딸아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
“미안해 엄마.”
“왜?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춥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딸아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현관 바로 앞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들었다. 그때 친정 조카 둘과 우리 아이들 둘, 동생까지 모두 일곱 명이 살 때였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나는 아이들을 모두 방으로 들어가게 하고 딸아이의 팔을 내렸다.
“벌은 나중에 받아도 돼. 왜 늦었는데?”
“다음 주에 기말고사라고 애들이 독서실 가서 공부하자고 해서 따라갔었어. 그런데 전화기를 잃어버렸어. 그래서 교실로 다시 가서 여기저기 다 찾아봤는데 없었어. 가방을 털어서 뒤적거려도 없었어. 다시 독서실 가는 길을 따라서 혹시 흘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친구 휴대전화로 전화를 계속하면서 다녔는데 전화기가 없었어.”
“그래서 이 시간까지 전화기 찾아다녔어?”
“아니, 나중에 찾았어. 학교에 있는 실내화 주머니에서.”
“그런데 왜 연락 안 했어?”
“어차피 독서실 3시간 끊었으니까 하고 가야 된다고 친구들이랑 조금 했는데, 그때 이미 휴대전화 밧데리도 없었어. 그리고 나중에는 애들이랑 간식 먹고 집에 간다고 놀다가 깜박했어.”
“그래도 너무 늦었잖아? 엄마가 걱정할 것은 생각 안 했어?”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잊었다가 헤어지고 나서 생각났어. 잘못했어요.”
“밥은?”
“먹었어. 친구들이랑”
“그래, 늦었다. 어서 씻고 자!”
그때야 아이들이 작은 방에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제각각 한마디씩 던지고 싶은 모양이다. 고등학교 다니던 조카가 한마디 불쑥 던졌다.
“우리 엄마 같으면 너 벌써 귀싸대기 날아갔다. 머리도 죄 뽑혔을 거여.”
“핸드폰은 바로 뺏기고. 우리 엄마 특효약이거든. 그거 돌려줄 때까지 똑같은 소리 해대지! ‘핸드폰은 엄마한테 연락하라고 사줬지 친구들이랑 떠들라고 사줬냐? 어차피 엄마한테 연락하지 않을 것이니까 당분간 안 돼!’ 자영이 넌 우리 엄마랑 같이 살았어야 돼!”
난 조카들을 흘겨보며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조용히 해라. 지금부터 한마디만 더 하면 너희 통금시간 9시로 정한다.”
“고모! 자영이 통금시간에서 연락도 없이 한 시간 늦었으니까 반성문도 쓰고 휴대전화 3일 금지하고 용돈 일주일 없어야 되잖아요! 차별하는 거네. 고모!”
“넌 독서실 안가잖아? 휴대전화 잃어버리지도 않았는데 연락 안 하잖아?”
“고모! 자영이가 거짓말할 수도 있잖아!”
“내가 느꼈을 때는 진심으로 느껴졌으니 믿은 것이고, 만약 거짓말이라면 자영이는 지금 죄책감에 눈을 바로 뜨지 못할 거야. 거짓말했다고는 안 믿어지는데?”
“우아! 고모 내가 거짓말하면 바로 알면서. 자영이 거짓말에는 속아 주는 것 같아!”
또래 아이들 네 명을 함께 키운다는 것은 통제가 매우 어려웠다. 조용한 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잔소리하지 않고 데리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정해놓은 규칙들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규칙을 어겼을 때는 당연히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 뒤로 늦는 날이 종종 있었다. 연락이 없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내 반응은 언제나 같았고, 체벌은 무릎 꿇고 손드는 것과 반성문이 전부였다. 같은 일을 반복했을 때는 체벌의 무게가 더 무거웠을 뿐, 지난 일을 들춰내서 잔소리한다거나 잘못을 비교하는 일은 없었다. 내 어머니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지겨움과 억울함이 각인되었던 탓이다.
어머니는 나의 잘못만 가지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었다. 오빠들이 잘못한 것까지 나에게 엮어서 나무라는 경우가 많았다. 역시 이유는 듣지 않았다. 아니 이유를 말할 시간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유를 말한다 해도 모두 거짓말이거나 변명일 뿐이었다.
“내가 니 머리 꼭대기에 앙거 있다잉. 내가 집에서 밭일이나 허고 있응께 느그들 허고 돌아댕기는 거 모르는 줄 아나본디. 천만에 말씀이여. 내가 시방 니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혀도 될만큼 느그들 생각은 다 알어야!”
진실이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은 진실이었다. 어머니의 잣대는 항상 어머니께 기울어 있었고, 내 생각이나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난한 살림에 4남 1녀를 키워야 했고, 아들 네 명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머니 나름의 기준이 있어야 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사내아이처럼 억세게 자랐던 나를 오빠들과 같은 범주에 넣는 것은 어찌 보면 어머니께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막무가내 우격다짐이 가장 싫었던 나였기에 우선 아이들과의 대화를 시도했었다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가끔 어머니께 농담처럼 어머니의 우격다짐으로 나무라는 것이 싫어서 아이들에게는 잔소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다시 우격다짐으로 나를 누르신다.
“내가 언제 그랬시야. 나 맹키로 느그들 말 잘 들어주고 이야기도 많이 한 에미가 있는 중 아냐? 호강에 초친 소리 허고 자빠졌네. 느그들 맹키로 지앙시러운 것들이 어디 있었가니? 니가 시방 안 좋은 것만 기억혀서 글제. 너는 으째 좋응 거는 다 까묵어 불고 안 좋응 거만 기억허고 있냐?”
어머니의 우격다짐에 나의 대답은 언제나 같다.
“네,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좋은 일도 많이 기억해요. 엄마만큼 좋은 엄마가 또 계시나요? 없죠. 그러니까 오래오래 사세요.”
연세가 드시면서 병약해지는 어머니를 보며 지금 이렇게 우격다짐하실 수 있는 기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대책 없는 우격다짐에 상처도 받았고 아픔도 많았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계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어머니의 성격일 뿐이라는 것. 그것이 어머니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그림=임솔빈)
새벽 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자다 일어나서 화장실 가던 아들이 내 방문을 열었다. 벌겋게 피곤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작업하는 나를 보더니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지금 몸살 났잖아? 그런데 날 새우며 일해? 제발 좀 적당히 하고 자면 안 돼요?”
“엄마한테 잔소리하는 거야?”
“잔소리 안 하게 생겼어? 날마다 밤새워 일해야 돼? 내일 하면 안 돼?”
“하다가 보니 시간이 걸리네? 마무리하고 잘 거야. 근데 엄마는 너희한테 그렇게 안 했는데? 먼저 이유부터 물었는데? 너는 왜 잔소리부터 하는 건데!”
“그건 내가 잘못했는데, 잔소리 안 하게 생겼어?”
“버릇 되면 나중에 너희 애들한테도 그렇게 하게 될걸?”
아들은 내가 일을 마칠 때까지 옆에서 졸며 기다렸다. 잔소리보다 엄마 때문에 아들이 잠 못 자고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더는 일은 진행하지 않고 저장한 후 아들을 불렀다. 컴퓨터가 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갔다. 대화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엄마에 대한 반항심이었을까? 아들은 대화로는 엄마를 당할 수 없기에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잔소리가 효과 없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기에….
[작가 약력]
전남 나주 출생
전북 군산 거주
1995년~99년 소설창작모임 운영
2003년 수필집 [누룽지와 꺼먹고무신] 출간
2004년 월간 시사문단 시 등단
2004년 계간 대한문학세계 소설 등단
2011년 시집 [여백] 출간
2015년 현재
(사)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 이사
계간 대한문학세계 심사위원
대한 문예대학 강사
대한 시낭송가협회원
웹디자이너
홈페이지 : 설연화의 문학공간 (http://sichenji.com)
※ 설연화 작가의 [사고뭉치 엄마의 괴짜 교육법]을 연재 중입니다. 매주 월요일 새로운 글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