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일터에서 건강하게 일할 노동자의 권리가 위협받고 있다.
그렇잖아도 OECD 가입 국가 중 산재사망률 1위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는 산업재해 은폐를 부추기고 건설업 산재사망을 방치하는 개악이라 보고 반발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은 지난 16일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 추진계획’(이하 추진계획)을 민관 회의기구인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전문위원회에 제출했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로 3일 이상의 휴업이 필요한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이 생기면 사업주가 1개월 이내에 고용노동부에 보고하고 이를 위반하면 즉시 과태료(1천만 원 이하)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추진계획은 산재발생 보고제도를 합리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3일 이상의 휴업재해’를 ‘4일 이상의 휴업재해’로 완화하고 사업주의 산업재해 발생 보고 의무를 사실상 폐지했다. 추진계획대로라면, 앞으로 사업주는 산업재해 발생을 고용노동부에 자진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고용노동부가 산재·요양신청서 승인정보, 건강보험 부당이득금 환수 정보, 119구급대 등 응급차량 출동기록 등을 확인해 산업재해 발생을 인지한 후 사업주에게 알리고, 사업주는 15일 이내에 산업재해조사표를 제출해 산재 발생을 보고하게 된다. 이를 어기면 과태료를 부과한다.
이는 고용노동부가 알게 된 산업재해에 대해 사업주가 서류 제출을 통해 확인하라는 것으로, 사실상 보고제도의 폐지를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산재 발생 보고를 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적게 돼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제10조는 요식행위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 산재은폐 사업장의 명단을 공표하고 건설공사 입찰을 제한하는 등의 산재은폐 방지제도도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민주노총 최명선 노안국장은 “산재신청 승인 과정까지 간다는 것은 사업주가 산업재해를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고용주가 오히려 사업주에게 안내를 하고 산재조사표 제출을 요구한 뒤 이행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리겠다고 한다”며 “사업주가 산재를 은폐해도 서류만 내면 다 면제해주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추진계획은 또, 산업재해 산정 기준에서 ‘경미한 재해’를 제외하고, 특히 ‘법 위반에 따른’이라는 단서조항을 넣었다. 산재다발 사업장 명단 공표에서 재벌 대기업이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현행 규정은 재해율과 사망만인율(연간 상시 근로자 1만명당 발생하는 사망자 수로 환산한 것)이 같은 업종·규모의 사업장에 비해 현저히 높거나 산재 미보고, 중대 산업사고가 발생하는 등 안전보건 조치가 불량한 사업장을 공표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추진계획은 ‘법위반에 따른 중대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으로서’라는 단서를 달음으로써, 산재발생 자체를 공표토록 한 현행 규정을 뒤집었다.
그대로라면, 발생한 산업재해가 법위반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를 사법부가 최종 판단하기 전까지는 그 중대재해를 공표할 의무가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청산재가 발생한 원청 대기업이 기업 내 법무팀이나 대형 로펌을 동원해 법적 소송을 이이나가 면죄부를 받고, 설령 소송에서 대기업이 패소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사고 발생 몇 년 뒤의 일이 돼 버릴 것이라는 게 노동계의 지적이다.
민주노총 최명선 노안국장은 “고용노동부는 해마다 중대재해 다발 사업장 목록을 공표함으로써 해당기업에 경각심을 주고 예방대책을 세우도록 해왔다”며 “하청산재의 경우에도 원청의 명단을 공개해 원청이 산재예방에 더 나서도록 하는 게 이 제도의 취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건설업 재해율을 반영하는 입찰참가자격사전심사(PQ) 제도에 한때 ‘법위반에 따른 중대재해’라는 단서를 넣었다가 대기업만 소송을 통해 산재다발기업 명단에서 빠져나가는 사태가 벌어져 제도 자체를 폐지한 적이 있다”며 “이번 고용노동부 계획은 그 제도를 다시 전체 업종으로 확대해 들여오겠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추진계획은 이밖에도 중소사업장 산재예방을 위해 올해 하반기 도입되는 안전보건관리담당자 선임 제도를 제조업, 임업, 하수폐기물처리업, 원료재생·환경복원업에만 적용하고, 건설업과 농업, 어업, 숙박·음식점업 등 다수 업종에 대해서는 제외했다.
건설업의 경우 3억원~120억원 규모의 사업장은 이미 재해예방 전문지도기관의 지도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숙박 및 음식점업은 경미한 재해가 많고 소규모 사업장은 상시 인력을 두고 조직적인 관리를 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제외했다.
재해율이 제조업(1.08%)보다 높은 농업(1.12%)과 어업(1.93%)은 “사업장의 특징을 감안해서”라는 불분명한 이유로 적용대상에서 제외했다. 도·소매업에 대해서는 아예 근거도 내놓지 않았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전북본부는 “추진계획에 따른 적용 업종 중 제조업을 제외한 다른 업종은 종사노동자 숫자가 미미한 반면, 제외된 업종 중 건설업의 경우 120억 미만 건설공사 현장에서 2014년 한 해에만 노동자 328명이 사망했다”고 지적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방문해 점검하는 대행지관의 지도를 받고 있다고 해서 제외할 순 없다”고 반발했다.
또 “산재의 80%가 발생하는 중소사업장에서의 산재예방을 위해 제도를 도입한 국회 입법의 취지를 시행령에서 완전히 무너뜨리는 짓”이라고 규탄했다.
단체는 23일 오전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쉬운 해고와 파견노동자 확대로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던 정부가 이제 산업안전보건법 개악으로 안전규제 완화의 대대적인 물꼬를 트려 하고 있다”며 “법령 개악 추진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민주노총 전북본부는 23일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용노동부가 산재발생 보고제도 합리화 등의 미명 아래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악하려 하고 있다며 철회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