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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5-05-12 09:57:27

대장 떴다. 헤쳐모여!


... 편집부 (2015-04-13 09: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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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상 내 세대 아버지라는 이름은 무섭고 근엄한 이름이었다. 자식들의 성장을 묵묵히 바라보며 훈육을 담당하고 권위적인 집안의 가장 어른이자 대장이었다. 물론 내 아버지는 아니었다. 어머니의 억척스러운 성격에 눌려 자식들에게 방관자였다. 아버지의 별명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언제나 불만이었고, 아버지는 그저 허허 웃기만 하셨다. 모든 대소사의 결정은 어머니 의견이 우선이었기에 아버지의 어깨는 너무 작아 보였다. 아버지의 의견은 언제나 허공의 메아리였다.

권위가 없었던 아버지가 가장 싫었던 것은 학교 문제였다. 내가 원하는 곳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반대하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내 편을 들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아버지 마음은 내 편이었다. 그러나 내 편이 아닌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 전부였다. 상황은 언제나 어머니의 주장대로였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는 마음만 내 편이라는 것이 더 싫었다. 차라리 내 편이 아니었다면 미워할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고 아이들 편이 되는 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고, 내 의견을 꺾을 수도 있고, 의사 결정권을 가진 아버지. 내 아이들에게 그런 아버지를 만들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권위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쯤 사회 분위기가 전환되기 시작했다. 아니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던 아버지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돈 버는 기계이고 얼굴조차 볼 수 없이 바쁜 사람. 아버지의 대명사였다.

남편 또한 사회의 흐름에 따라 바쁘게 뛰어다니며 가족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다. 건설 쪽 자영업이었던 남편은 IMF라는 외환위기를 겪으며 더욱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대부분 타지에 나가 있었고 집은 몇 개월에 한 번씩 들어올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모든 의사 결정은 본의 아니게 내 몫이 되었고, 남편은 내 아버지처럼 방관자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친구들과의 약속이 많아지던 때였다. 인천에서 큰 공사를 맡아서 하고 있었던 때라 몇 개월 동안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아주 가끔 필요한 것들이 있을 때 사무실에서 건축 자재들을 챙기고 잠깐 집에 들렀다가 얼굴만 보고 갈 뿐이었다. 아이들과 가끔 전화 통화는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 공정이 끝나고 며칠 집에 내려와 쉴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 내려오는 중이라고.
학교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문자를 보내놓았다.
“아빠 오신다네? 오늘 저녁은 아빠랑 함께 저녁 먹게 일찍 들어와”
그러나 아이들은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문자만 날아왔다.
“나 며칠 전부터 오늘 친구들이랑 노래방 가기로 했는데…. 아빠 며칠 있다 가실 거잖아. 내일 밥 먹어. 나 오늘 좀 늦어!”
“엄마, 나 오늘 애들이랑 축구시합 하기로 했어. 좀 늦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몇 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지만, 아이들은 없고 단둘이 앉아 저녁을 먹어야 하는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스레를 떨었지만 웃는 모습에서 난 아버지의 한숨을 보았다.

남편은 며칠 쉬겠다고 했지만, 쉴 수 있는 여건은 되지 못했다. 사무실에 나가서 서류 정리도 해야 했고 밀려있는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남편은 새벽부터 나가고 없었다. 아침 식사자리에서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학교를 보냈다. 그리고 나가는 등 뒤에 조용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를 던졌다. 웃음기도 장난기도 없는 말투였다.
“오늘 저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들어와. 늦으면 알아서 해.”
“네!”
아이들은 5시 넘어서 학교가 끝났다.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현장에서 일이 생겨서 지금 인천으로 올라가야 해. 애들하고 저녁 못 먹어서 미안하고, 집에 들렀다 갈 시간이 없으니 여기서 바로 올라갈게. 애들이랑 고생해!”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과 보낼 시간도 없이 바로 올라가야 하는 남편의 마음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지친 얼굴로 돌아와 피로를 풀 시간도 없이 바로 올라가야 하는 일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족이 모여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맞춰주지 않았던 아이들에게 화가 났다.

아이들은 7시가 다 되어서야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둘이 나란히 들어왔다. 수다를 떨며 들어오던 아이들은 집안의 싸늘한 공기를 감지한 모양이다. 현관문을 닫고 들어서면서 조용해졌다. 일단 준비한 저녁을 셋이서 먹으며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식사는 무조건 맛있게 즐거운 분위기에서 먹어야 한다는 나의 지론이 유일하게 깨진 날이었다. 아이들은 나의 눈치만 보고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내가 거실에 자리하고 앉자 아이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엄마가 화 난 것 같아서.”
“왜 화가 났을까?”
“…….”
“다른 것은 놔두고 한 가지만 묻자. 너희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냐?”
“…….”
아이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아이들의 대답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말을 이어가야 할 내가 입을 다물고 아이들을 바라보자 딸아이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지켜주는 사람.”
“그런 의미밖에 없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분.”
“또?”
“…….”
“아버지는 왜 밖에서 가족과 떨어져서 일해야 할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빨래하고 싫어하는 식당 밥으로 세끼를 먹고, 혼자 자야 하고….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머나먼 곳까지 가서 일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군산에는 일이 없으니까.”
“군산에도 일은 있어. 다만 너희에게 조금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서. 너희가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비교당하지 않고, 가난한 아이들 취급받지 않고, 좀 더 당당하게 다닐 수 있게 해 주고 싶어서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가족과 떨어져서 돈을 벌어야 하는 아버지가 모처럼 집에 돌아왔는데, 너희는 친구가 중요해? 축구시합이 중요해? 아버지는? 너희를 낳았다는 죄로 소처럼 일하고 대접도 받지 못하고, 가족들 얼굴 바라보고 한 끼 식사도 못 하고 그렇게 다시 일하러 가야 하는 아버지 마음은 생각해 봤어?”
“…….”
“부모는 너희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지켜야 할 의무는 당연히 해야겠지. 하지만 자식의 의무도 있는 거야. 너희를 위해, 가족을 위해 외로움도 힘겨움도 고단함도 참아내며 일하는 아버지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해주어야 아버지도 일하는 것이 즐겁지 않을까? 그래야 보람 있는 것 아닐까? 가족끼리 저녁을 함께 먹지 못한 것이 뭐 그리 큰일이냐고 지금 묻고 싶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버지한테는 절실한 그리움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
“잘못했어요!”
“난 너희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 달라고 강요는 못 해. 그건 네 아버지의 능력이고 너희의 몫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 일이 항상 그렇듯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것쯤은 이제 다 알잖아?”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언제나 아이들의 의견을 묻고 수렴하고 대화를 하던 내가 일방적인 훈계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나의 유년시절을 기억해 내고, 억울한 마음만은 주지 않으려고 언제나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때만큼은 예외였다. 내 생각은 단호했다.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아이들의 마음은 강제로라도 심어주고 싶었다.


(그림=임솔빈)

남편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전화했다. 아이들에게 별일 없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내가 하는 일은 잘되고 있는지. 먼 곳에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가족과 함께하고 있는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남편의 목소리는 많이 지쳐있었다. 몇 년 동안 쉴 수 있는 여건이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자영 엄마, 오늘 집에 내려갈 거야. 바빠서 같이 저녁 먹고 할 시간은 없고 사무실 갔다가 잠깐 얼굴만 보고 집에서 7시에는 출발해야 해! 그냥 아이들 얼굴만 보면 되니까….”
남편에게 전화가 왔던 것은 2시쯤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난 아이들 담임선생님께 전화 했다. 자영이 담임선생님은 자리에 있었지만, 태훈이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가고 없었다.
“자영이 6교시 끝나면 바로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오늘은 7교시 수업이라서 곤란합니다. 자영이 어머니.”
“알아요. 집에 급한 일이 있어요. 조퇴라도 시켜주세요.”
“무슨 일이시기에….”
“가정사를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고요. 부탁합니다. 선생님!”
태훈이 담임선생님께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4시가 되기 전에 집에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둘 다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아빠 오신다고 해서. 조금 있으면 들어오실 거야. 옷 갈아입고 씻어. 그리고 너희 방 청소 좀 해놔!”
“그냥 저녁같이 먹으면 되는데 조퇴까지 할 필요 있었어?”
“…….”
“왜? 아빠 또 그냥 가신데?”
“그래. 엄마가 가족이 함께 밥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지? 대화만큼 중요한 것이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것이라고. 왜 가족을 식구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몇 번이나 말했지?”
“알아,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엄마가 고지식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엄마 생각은 그래. 한 가족이 식사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하루 있었던 일과를 이야기하고, 서로의 삶에 관심을 두는 것. 현대를 살아가면서 잊고 사는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그래서 항상 식탁은 즐거워야 하고.”
“알았어. 얼른 씻고 청소할게.”
남편은 5시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은 지쳐있었고, 웃고 있었지만 서글픈 웃음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방에서 나오자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딸아이가 뛰어가 남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태훈이는 뻘쭘하게 옆에 서서 머뭇거렸다. 그리곤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아이고, 우리 아들! 못 본 사이에 키가 엄청나게 많이 컸네?”
“한 달밖에 안 지났는데요?”
“그때는 정신없어서 대충 봤지. 근데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왜 집에 있어?”
딸아이가 방긋 웃으며 까불었다.
“아빠 온다고 해서 학교에서 도망 왔어. 지난번에 아빠랑 밥도 못 먹었잖아!”
“아이고, 우리 딸 그랬어? 아빠가 고맙네?”
“아니지! 아빠가 고생하고 있는데 우리가 감사하고 고맙지!”
딸아이는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막힘없이 쫑알거렸다. 걱정만 했을 뿐, 아이들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남편은 그윽한 눈으로 두 아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쫑알거리는 딸 아이를 품에서 내어놓지 못했다. 한 손으로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것이 남편의 아이들 사랑 법이었다.

몇 시간 함께 있지 못했지만, 들어올 때 지쳐있던 남편은 활기찬 모습으로 어깨를 활짝 펴고 온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으로 떠났다. 그 이후 까다로운 담임선생님이 아닌 이상 학교에 전화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 휴대전화로 간단한 문자만 보낼 뿐이었다.
“우리 집 대장 떴다.”
아이들은 문자가 뜬 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와서 함께 식사했다. 중요한 약속이었을 때는 집에 와서 충분한 대화를 나눈 후,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강요는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의 표현으로 한 끼 식사 정도는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가족의 식사는 계속되었다. 매일 먹는 밥과는 달랐다. 성인이 된 후에는 집에서 가족이 같은 시간대에 밥을 먹는다는 것은 힘들었다. 언제나 대화 부족이라는 것을 느꼈다. 딸아이가 서울로 취업한 후, 가족이 모두 모이는 것은 명절이나 휴가밖에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었다. 남편의 힘은 가족의 응원에서 나온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딸아이가 약한 체력 탓에 치료차 군산에 내려와 있었다. 남편 또한 타지가 아닌 군산에서 일한 지 1년째다. 딸아이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남편은 병원으로 퇴근했다.
“딸을 매일 보니까 좋아?”
“병원에 있는데 뭐가 좋아.”
“중병은 아니잖아. 그러니 딸 얼굴 보니까 행복해?”
“서울에 있을 때보다는 낫지. 다 같이 있으니 애들 학교 다닐 때처럼 좋긴 해!”
“그런 마음을 딸한테 표현하면 좋잖아!”
“말 안 해도 알겠지. 뭐”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절대 모르거든요?”
남편은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병원 밥이 지겹다는 말에 아들과 함께 딸아이 병실을 찾았다. 근처에서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식사가 나오기 전 내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너희한테 아버지는 어떤 존재?”
“엄마, 그걸 확인하고 싶어? 우리 집 대장이잖아. 아버지가 없으면 우리 가족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이제 엄마가 말 안 해도 다 알아!”
“태훈이는?”
“아빠? 엄마의 보험. 항상 어떤 잘못을 하면 마지막 보루가 아빠잖아. 너 여기에서 한 발짝 더 틀어지면 아빠한테 이른다. 제일 무서운 소리잖아. 아빠는 우리 가족의 보호자이며 절대자니까.”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감출 수 없었다. 아버지의 권위는 스스로 만들 수 없다. 함께 하는 사람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권위일 것이다. 더군다나 가부장적 사회가 무너지고 여성의 목소리, 아내의 목소리, 엄마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누르기 시작하는 지금의 사회에서 아버지가 설 자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나는 현대 사회에서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다. 서글픈 모습이다. 축 처진 어깨에 피곤한 일과를 정리하고 들어와 다시 가사노동 분담을 해야 하고, 아이 육아를 도와야 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소외 시 되는 아버지의 자리.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는 적당한 권위와 적당한 위치에서 아이들과 친구처럼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더 큰 행복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옳고 그름의 판단은 각자의 몫이 되겠지만, 어머니가 모든 결정권을 가진 가정에서 자란 나의 판단은 아버지의 위치가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만 행복한 가족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가족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작가 약력]

전남 나주 출생
전북 군산 거주
1995년~99년 소설창작모임 운영
2003년 수필집 [누룽지와 꺼먹고무신] 출간
2004년 월간 시사문단 시 등단
2004년 계간 대한문학세계 소설 등단
2011년 시집 [여백] 출간
2015년 현재
(사)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 이사
계간 대한문학세계 심사위원
대한 문예대학 강사
대한 시낭송가협회원
웹디자이너
홈페이지 : 설연화의 문학공간 (http://sichenji.com)

※ 설연화 작가의 [사고뭉치 엄마의 괴짜 교육법]을 연재 중입니다. 매주 월요일 새로운 글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