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교육칼럼-‘시선’]
❰강문식 ❙ 민주노총 전북본부 교육선전부장❱
미국 대선을 둘러싸고 각종 이슈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 논란의 중심에 항상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서있다. 먼 나라 이야기이지만 한국 언론도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속속들이 보도하는 덕에 트럼프의 발언과 기행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트럼프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일갈했고, 멕시코 이민자는 범죄자라며 이민자 혐오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무슬림에게도 입국을 금지시키고 추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에 대한 비하 발언은 셀 수도 없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자유무역으로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다”, “무역자유주의는 반미주의자의 주장이다”, “월가에 세금을”. 이렇게만 놓고 보면 한국의 진보운동가가 꺼낸 말이라고 해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다. 트럼프가 종잡을 수 없는 발언을 내놓는 것 같지만 기실 일맥상통하는 흐름이 있다. 보통 이를 ‘고립주의’, ‘보호주의’라고 명명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같이 살기 벅차니 우리끼리라도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의 이런 입장을 미국 시민들이 지지하고, 공화당의 대선주자로 선출하기까지 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상대 후보인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도 이에는 뜻을 같이 하고 있다.
브렉시트와 유럽 각국에서 고립주의 확대
지난 6월 23일, 영국에서는 EU 탈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있었다.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EU 탈퇴로 결정되었다. 영국에서 EU 탈퇴 여론은 복합적이었다. 쇠락하는 제조업, 번창하는 런던 금융가, 보수당/노동당 양당에 대한 실망 등이 그 이유로 제기된다. EU 내 두 번째 경제 규모, 가장 큰 군대를 갖춘 나라인데,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정서도 팽배해 있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EU라는 통합 시장이 다수 노동자, 민중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악화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이유이다.
그런데 이 화살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어 들어오는 이민자에게 돌아갔다. EU분담금도 문제가 됐다. 영국 독립당을 중심으로, EU 탈퇴로 이민자 유입을 막고 EU분담금을 자국 경제에 사용하면 악화된 삶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선동이 이어졌다. 배제된 노동자 대중은 EU 탈퇴에 손을 들었다.

▲7월 2일 런던 중심가의 브렉시트 반대 집회에 참석한 한 여성이 ‘후회하는 영국’이라고 적힌 종이 팻말을 들고 있다.
9월 4일에는 독일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독일 우파정당인 기민당(CDU) 소속 메르켈 총리의 지역구가 있는 클렌부르크주 선거구에서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기민당을 제치고 2당의 지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독일을 위한 대안’은 반유로, 반이슬람을 표방하는 정당이다. 독일에서 AfD의 급성장 배경은 극우단체인 페기다(PEGIDA, 유럽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의 성장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프랑스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2015년 12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이민자 추방 등을 내세우는 극우정당 국민전선이 1차 투표에서 27.7%를 득표하여 전국 1위를 기록했다. 결선투표에서는 완패했지만 국민전선의 성장세가 무섭도록 가파르다.

▲프랑스 국민전선 대표 마린 르펜
이탈리아의 오성운동도 EU탈퇴를 선동하고 있고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등에서도 EU탈퇴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 스페인의 신진 좌파세력으로 각광받던 포데모스도 카탈루냐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장기화된 경제위기와 ‘나쁜 유토피아’
이들 운동의 공통 배경은 장기화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미래가 불투명한 대중들의 절망감, 고착화된 기성 정치 세력에 대한 반감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 연기, 중국 경제성장률 둔화, 유럽 은행 부실 등 경제 위기를 보여주는 표상은 셀 수 없이 많다. 이 경제위기가 출구 없이 장기화되면서 기존의 자유경쟁, 세계화를 부르짖던 신자유주의 이념과는 성격이 다른 고립주의, 보호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주장 세력이 ‘반체제 이념’으로 자신을 대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타티스 쿠벨라키스(그리스 시리자 전 중앙위원, 현재는 탈당)는 작년 프랑스 지방선거 결과를 분석하며 ‘전간기(戰間期) 파시즘이나 국민전선의 힘은 스스로를 ‘반체제적’인 것으로 대표하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극우파들은 대중의 분노와 급진주의를 전취하는 것을 통해 지지세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경제위기는 쉽게 표현하면 내 삶이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없어지는 걸 뜻한다. 경제위기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대안을 찾지 못한 민중들은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킬 대상을 찾는다. 솔깃한 유토피아를 보여주면 그것이 허무맹랑하더라도 그쪽으로 휩쓸리기도 한다. ‘나쁜 유토피아’다. ‘나쁜 유토피아’는 현실에 기반한 유의미한 토론을 실종시키고 오히려 다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을 더 나쁜 길로 내몰 공산이 크다.
나쁜 유토피아는 현실적 근거에 발 딛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부정하는 것만을 비판이라고 착각한다. 나쁜 유토피아는 자신의 가치와 이상에 반하는 모든 것에 대해 무한 폭력을 가함으로서 실천적 무능을 극복한다. 이 같은 담론 속에서 정치가 실종된다.(현대의 경계에서, 윤종희)
미국 트럼프, 독일 ‘독일을 위한 대안’, 프랑스 국민전선, 그리스 황금새벽당, 이탈리아 오성운동 등 최근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정치 세력에게 모두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과거 독일국가사회노동자당(나치)도 이런 배경에서 출발했었다.
한국도 이런 흐름에 정확히 맞물려 있다. 저성장,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증가, 소득 저하, 부동산 가격 상승 등 경제위기의 징표를 공유하고 있고, 새누리당-더민주의 보수 양당구조에 대한 염증도 비슷하다. 이런 가운데 이민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증오 감정 표출이 점차 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보수양당에 지친 유권자들은 정책도 내용도 보여주지 못하고서 ‘새정치’만 외치던 국민의당에게 표를 몰아주기도 했다.
트럼프의 기행을 웃어넘기기에는 상황이 가볍지 않다. 영국 브렉시트 투표 당시 IMF, OECD 등 국제기구를 비롯해 금융 자본은 브렉시트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영국 노동당 등 좌파 진영 역시 브렉시트 반대 활동을 펼쳤다. 자본주의 비판 세력이 ‘나쁜 유토피아’에 맞서기 위해 자본주의의 수혜 세력과 뜻을 같이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한국에서도 펼쳐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다수 노동자, 시민의 입장에서 다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 경로와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건강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글쓴이 강문식은]
민주노총 전북지역본부 교육선전부장입니다. 사회의 주요 쟁점들을 분석해 월1회 독자들과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