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원(전주 완산고등학교 사회교사·사진)
지난 8월 교육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화여대 사태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썼다. 의도치 않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의 서막을 연 이화여대의 총장사퇴 투쟁을 ‘귀족적 순혈주의’라고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교육부의 지원을 받는 반인간적인 강제에 수백 명의 잔다르크가 인간을 지켰다. 물론 이번 결과에 대해 이화여대생들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자신들만이 성골이며 진골이나 육두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끼리끼리 문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권장할 만한 선민의식이다. 칭찬할 만한 ‘끼리끼리’ 문화이다. 순혈주의 의도가 있어도 그 정도는 지적 살인을 자행하는 정권의 강제를 막은 것에 비하면 경범죄이다. 미래라이프 대학은 가치의 문제로서, 정서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2016.8.8.)
몇 주 전부터 대한민국은 시민혁명 중이다. 지금으로서는 이 혁명이 성공할지, 실패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더구나 성공한다고 해도 그 혁명이 지향하려는 궁극적 목표도 뚜렷하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계급 투쟁적이지도 않고, 정치적 의제도 확정되지 않았으며 보수와 혁신으로 대립적 구도를 갖고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 혁명을 이끄는 특정한 주체도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지난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가장 큰 정치적 투쟁, 형식적으로 완성된 것처럼 보였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에 대한 세대와 지역 및 계층을 가리지 않는 대중적 분노, 박근혜 대통령과의 타협은 지나갔다는 점이다.
2주 연속 토요일에 서울에서만 100만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대통령 지지율이 2주째 5%이다. 호남 및 30대의 경우에 0%이며 대통령의 정치적 아성이라 불리는 대구와 경북에서도 최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상적이지 않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조선일보마저 적이 될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분노를 폭발하지만 왜 당신이 사퇴하지 않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혹자는 대통령이 성장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상처를 겪게 되었고 신경증을 앓고 있어 비정상적으로 사고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정신적 결함이 있는 즉 비정상으로 보고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대통령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실수한 것은 인정하지만 대통령의 지위를 그만 둘 정도로 심각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국민이 대통령을 비정상으로 보는 것이 역설적으로 비정상일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은 보편적인 지적능력이지만 각자마다 특수하다. 즉 이성은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경험과 학습의 정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실체적으로는 특수하고 개별적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이 최순실의 지시를 받아 국정을 농단한 것이라고 회자되는 것은 인간 이성이 보편적이라고 보기 때문이지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 주위에 있는 그 누구도 대통령과 비슷해질 수 있다.
나아가 당신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최근의 정치상황에 대해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항변할 수 있다.
"지금 나에 대해 촛불을 들고 사퇴하라고 하는 국민들은 내가 그럴 줄 몰랐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간접적으로 정치를 했으며, 1998년 정계에 입문해 4.2 재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제19대까지 총 5선의 국회의원을 했습니다. 더구나 한 계파의 수장이었으며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한나라당 최고의원도 했습니다. 지난 20년이 넘도록 국민들에게 나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적 자질을 충분하게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국회의원도 모자라 제 18대 대통령으로 나를 선택했고요. 그 사실을 정말 몰랐습니까?“
“더 솔직하게 말해볼까요? 국민들은 내가 정치적 권력을 놓치기 싫은 권력욕에 가득 차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욕망의 부스러기라도 누리고 싶어서 나를 선택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나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없다면 국민이라고 하는 당신들은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자격이 있고 민주주의적 소양을 갖췄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항변도 그럴듯하다. 처연하고 처참한 이야기이지만 대통령의 항변을 모두 다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사회의 각 부분에서 보이는 저열한 시민의식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지난 12일 서울에서만 100만 시민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자 13일 한국교총은 한국사 국정교과서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2015년, 이 무렵에 박근혜 정권이 한국사를 국정화한다고 하자 단연코 찬성한 교총이 반대한다고 한다. “국정화방향이 달라졌나, 국정교과서 내용이 바뀌었나, 필자가 달라졌나?”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진리를 가르친다고 보는 교사들의 최대 조직인 교총의 입장이 바뀌었다.
지난 경기도 지사 선거에서 현 경기도 지사인 남경필 도지사가 “경기도의 아들인 남경필이 대한민국의 딸인 박근혜를 지키겠다.”고 절규하는 외침이 아직 귓가에 선연한데 대통령 보고 사퇴하라고 한다. 그때 정말 몰랐었나?
지금 새누리당의 국회의원 중에서 대통령에 대해 사퇴 또는 탄핵하라고 하고 탈당을 하겠다는 국회의원 중에서 상당수의 행태를 봐도 박근혜 대통령이 안타깝다.
당신의 후광으로 지난 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수많은 정책과 입법과정에서 대통령의 아바타가 되어서 행동했건만 어느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야당보다 더욱 강경한 민주투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호가호위하고자 안달했던 친박, 진박은 다 어디 간 것인지 이정현 대표 이하 몇 명만 끈덕지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얼마 전에 청와대에서 원로의 고언을 듣겠다고 한 자리에서 “잠이 보약이라고 했다.”고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이토록 이율배반의 배신의 정치와 사회에서 당신을 이해한다.
대통령은 지금 너무 억울해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지난 선거에서 나를 찍은 것은 나에게 공모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왜 지금 와서 나만 희생양 삼으려고 하고, 내가 지금의 정치적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당신들처럼 최순실, 우병우 등을 희생양을 삼겠다는데 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자탄하는 것도 새겨 볼만한 이야기이다.

▲11월 19일 전주 관통로사거리에 모인 시민들.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가 더 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지금의 이러한 변명들은 대통령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즉시 사퇴해야 하는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 사회에 박근혜 사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며 이를 위해 국민들이 깨어 있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공동체 성원이 모두 보편적 이성을 갖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국민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선거연령에 제약을 두는 것도 보편적 이성을 갖는 것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 전제를 바탕으로 다수에 의한 선택을 전체의지로 간주하고 주권을 위임한 대표자에 의해 자기지배를 합리화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일 뿐이지 지고지순하거나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다.
플라톤은 생존해있다면 지금의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정말 개돼지의 나라이고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기 직전의 그리스 아테네의 데자뷰 라고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 역시도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근대에 오기까지 대부분의 지성은 민주주의 대해 매우 경멸적이었다. 민주주의는 매우 천박한 정치사상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도 별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동물적 욕구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종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가치에 대해 독식하던 것을 나눠먹으면서 오랫동안 먹기 위한 것이었고 그 명목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 바탕이 이성이었다.
근대 이후에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은, 이성을 강조한 것은 사회성원 중에서 배우지 못하고 노예가 많고 사회적 생산력이 떨어져가 아니라 원래 인간이 근본적으로 동물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에 대해 매우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성은 철저하게 개별적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이성적인 것이 타자에게 이성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순으로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 제도화되었는데 거듭 말하지만 이 모든 단계는 인간이성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민주주의가 정치적 봉건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보편적 이성의 허구성 때문이다.
나는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보편적 이성을 추구한다고 보지 않는다. 단지 그의 이성의 한계에서 박근혜의 이성을 생각했을 때에 비정상이었으며 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사퇴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성에 대해서도 의심하기도 한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성이 보편적이지 않다면 대통령이 사퇴한 후에 더 나은 미래가 우리에게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무시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공동체에서 공생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지만 최소한 규칙마저 사라졌을 경우에 종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다.
결국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그 규칙을 지킬 수 있는 민주주의적 시민으로서 의식적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을 확신할 수 없고 안타깝지만 우리의 경우에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비극적이고 비관적이지만 지금의 정치가 문제인 것은 최소한의 규칙을 버렸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아니다. 어떻게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그럴 수 있어 하는 것도 최소한의 규칙을 지키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그녀만이 나빠서가 아니다.
지금의 상황을 천박하게 비유하면 “대통령에게도 도둑질은 허용되는데 살인을 한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 누구라도 살인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유달리 많이 죽인 것이다. 대통령이 연쇄살인범이 되었으니 국민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적으로 보면 인간이 동물로서 갖고 있는 연쇄살인의 충동에 대해 국민 스스로가 두려운지도 모른다.
차라리 비도덕적 개인과 도덕적 사회를 선택하자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절대적인 답은 갖고 있지 않다. 다만 흔히 깨어있는 시민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를 구상하지만 깨어있을 수 있냐고 물어보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이것은 정상적 민주주의 초석인데 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하는 나마저도 자기 고백적이지만 쉽지 않다. 다만 자유주의자로서 깨어있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공동체적 자유주의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공동체의 규칙을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것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지키는 자유주의자, 개인적으로 비도덕적일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도덕주의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와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어떤 공동체가 매춘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으면서 간통에 대해서는 손가락질 하는 인간의 이중적 삶이 지속되는 한 민주주의는 저열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차라리 매춘은 악이지만 간통은 악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 옳다.
간통은 엄밀하게 보면 사적인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약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 계약을 파기하고 상대에 대해 보상하면 된다. 그것은 국가가 형사적 처벌을 할 사안아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매춘은 다르다. 매춘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물적으로, 화폐적으로 도구화 한 것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존중마저 무시하고 상대를 동물보다 못한 무생물로 대우한 것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이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겠다는 사람들마저 매춘을 정당화하는 사회이며 간통에 부정적이라면 박근혜를 대통령 지위에서 사퇴시킨다고 해서 더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정치적 회의주의에 빠지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 왔는지에 대해 돌아보자는 것이다.
인간지성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는 천박한 정치상황에서 매춘을 선으로 보고 간통을 악으로 보고 있기에 나경원, 남경필, 오세훈, 교총도 박근혜를 공격하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 자신도 악다구니처럼 권력을 지키면서 최순실을 속죄양으로 삼으려고 한다.
최근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당선에 대해 우려가 많다. 그가 선거운동 기간 중에 보인 언행들을 보면 대통령으로서 자질이 의심스럽기까지 한다. 그런데 미국인은 힐러리 대신에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있다. 미국인은 트럼프에게 “당신이 했던 간통은 용서해 줄 것이니 공정과 정당성으로 포장한 월가와 워싱턴의 악습을 깨뜨리고 위선이 없는 미국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가장 민주적인 척 하는 미국의 금융과 정치의 지배층이 갖는 두 얼굴의 가면을 벗기라고 암시하는 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이토록 너덜너덜한 민주주의를 띠고 있는 것은 대통령제, 내각책임제, 박근혜, 이명박의 문제이기보다는 인간의 동물성을 부정한 엄격한 정치적 도덕성과, 이성의 개별성을 무시한 허구적 이성, 그리고 도덕의 영역이 매우 잘못되게 설정되지 않았냐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성, 예술, 감정 이런 부분에 대해 극히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치, 경제, 사회제도에 대해서는 처세와 타협이라는 매우 비도덕적 잣대를 정당화하고 있다. 특히 처세와 타협이 사회성이라는 무기로 당연시 되는 가장 추악한 희소가치분배과정이 우리 사회의 정서이고 나는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사회적 악습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솔직하지도 못하게 자유스러워야 할 것을 가장 부자유스럽게 평가하고 부자유스러워할 것들을 가장 자유스럽게 간주한다.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를 지속하려고 한다.
결국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는 허구적 의식을 버리지 않고 이성의 보편성과 완전성을 상상하면서 위선적 삶의 태도를 지속하는 한 박근혜는 계속 등장한다. 그나마 지금의 이 상황에서 우리 86 세대가 마지막으로 박근혜류의 정치를 온 힘을 다해서 막고 있다고 본다.
진정한 교육만이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지속할 수 있다
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본다. 자유로움과 자유롭지 못한 것을 제대로 다시 구분하는 교육만이 인간의 존엄한 삶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비유적이지만 우리 사회가 간통에 대해서 좀 더 느슨하고 매춘에 대해서 가장 분노하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즉 인간에 대한 가치기준이 달랴져야 하며 교육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며칠 전 전북교육청의 홍보매체인 <생생통신>의 기사가 내부 통신망을 통해 왔다. 김승환 교육감이 도교육청의 각 과장을 모아놓은 확대간부회의에서 제시한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그의 의견이 실렸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불타는 투쟁의지가 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 기사를 보고 나는 쓴 웃음을 넘어서서 아득했다. 한마디로 교육감으로서 한계와 지금 교육감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성찰적 의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김승환 교육감은 분명한 전북교육의 수장이다. 전북 교육의 대부분의 중요한 정책적 결정이 그의 의지와 철학에 담겨있다.
지도자란 무릇 이래야 한다고 본다. “미래에 대한 꿈은 원대하고 장기적이어야 하지만 누구보다도 굳건한 현실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지도자만이 현실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 더구나 개혁과 진보의 깃발을 들었다면 그의 치세를 보지 말고 항구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자신을 던져야 한다.”
하지만 ‘생생통신’의 기사에서 내가 본 교육감은 지도자의 처신에는 미치지 못한다. 사회적 동물로 일상이 정치지만 교육감이 속칭 정치를 하려거든 당장 교육감을 그만 하셨으면 한다. 지금 당장 사퇴하시고 당신이 지향하는 정치의 정당을 찾아 정치투쟁의 선봉이 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교육감으로서 확대간부회의에서 논의할 사항은 ‘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라 이미 황폐를 넘어 파편화의 단계에 이른 전북교육이 중심이 되었어야 하며 그 내용이 ‘생생통신’ 의 기사로서 학교의 교사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전북교육은 누리과정 문제는 그만두고라도 학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척박한 상태이며 가장 낮은 교육수준을 보이는 아이들의 삶을 질을 개선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를 갖고 있다.
교육감은 확대간부회의라면 실질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그 대안을 도교육청 국장 과장이나 각 지역교육장에게 찾아오라고 했어야 한다.
지금 시민혁명으로 박근혜를 사퇴시킨 이후에 항구적이고 공고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학교가 주체적 아이들을 양성하도록 하고 그 정책과 지원에 매진하는 것이 교육감으로 더 좋은 태도라고 본다. 박근혜가 사라진 이 땅의 삶을 지고 가야할 아이들의 가슴과 머리에 무엇을 담겨줘야 하는가에 대해 교육감은 진보주의자라면 더욱 더 고민해야 한다.
그러니 공식적이고 중요한 의사결정과정인 확대간부회의에서 교육의 질을 놀이는 정책에 대해 여러 법리적 논쟁을 하고 타당성을 꼼꼼하게 챙기는 것이 더 좋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듯이 누가 교육감이 되어도 전라북도 교육청 확대간부회의에서 각 과의 과장들이 정책을 가지고 불꽃 튀는 논쟁의 자리이기를 간절하게 원한다.
영원한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말처럼 각 과의 과장들이 지역교육장들이 노무현에게도 했던 것처럼 교육감에게 “계급장 때고 한 판 붙읍시다.” 그런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오직 교육감의 눈에만 들려고 하고 무능한 정책들을 미사여구로 채우는 그런 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토대를 구축하고 그렇게 교육정책을 고민하면 교육감은 지금 거리에서 촛불을 들지 않아도, 개인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아도 가장 민주주의적이며 김근태 못지않은 최후의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진심이다.
플라톤이 아테네를 걱정한 것은 말하지 않는 인간이 없고, 손들지 않는 인간이 없고, 투표하지 않는 인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거나 않는 인간이 없어서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도덕적인 척하며 사회적으로 가장 비도덕적인 귀족과 시민들이 가득했기에 아테네는 망한 것이다. 그렇기에 유치원의 창시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교육의 가치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깨달은 사상가이다.
교육감이 가장 먼저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이 지역에서 고통 받는 많은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교육정책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것이며 실사구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김승환 교육감 옆에 십상시가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다만 교육감의 진보가 전북의 아이들과 부모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상식을 정당화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짜 인간다운 사회이다
지성의 역사에서 많은 지성들이 분명하게 강조한 것은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모든 가치는 상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상식을 깨는 것이 혁신이자 좌파가 아니라 상식이 아니었던 것을 상식으로 돌리고, 보지 못하는 상식을 보이는 상식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진보좌파였다.
역사라는 거대한 배에서 보면 공정하거나 효율적이지 못한 개인이 터럭만큼 작고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권력에 연연하거나 그 가랑이에 붙고 날라 다니는 것은 처연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박근혜 사퇴의 선봉에 섰다고 해서 조선일보가 달라진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조선일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항상 줄을 서는 이런 삶의 방식을 없애거나 줄이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 그것을 키우는 것이 교육이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 진짜 진보교육감의 책무라고 본다.
조선일보에 동요하지 않는 인간을 키우는 것, 그 것이 권력이나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 김승환 표 교육정책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손석희가 종편인 jtbc에 갔을 때 허구적 진보주의자들은 종편에 투항했다고 했으며 종편과 공중파라는 이분법적 대립의 구도에서 그와 현실을 설명하려 애썼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적과 동지만 있었으며 선연한 형식만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손석희는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게 강단 진보주의자와 진짜 진보주의자의 차이점이다.
손석희가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노도와 같은 혁명이 가능했을까? 이 상황을 김승환 교육감이 성찰하기를 바란다. 지금 전북 교육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석희 같은 자기 성찰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을 양성하려면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도록 하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신념은 과연 그것에 부응하는가? 내가 추진하는 정책은 대중적이며 현실적인가?
마지막으로 호접몽 이야기로 내 이야기의 모든 것을 가름하고자 한다. “장자는 어느 날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너풀너풀 날아가는 즐거운 나비였다. 그런데 갑자기 잠에서 깨어보니 장자였다. 장자는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자는 호접몽 이야기를 통해서 나비 또는 장자의 관점에 고착되어 생각하는 작은 관점에서 벗어나 큰 관점을 획득함으로써 현실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지양[止揚 , Aufheben] 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즉 타자의 입장을 상상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인식을 크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장자의 회의는 그가 나비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현실의 토대 위에 나비가 되어봄으로써 세계에 대한 더 큰 관점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나는 김승환 교육감에게 이런 점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으면 한다.
더 큰 관점을 얻기 위해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이지 교육감이 진짜 나비가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현실은 회의의 공간일 수밖에 없으며 박근혜의 아바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박근혜의 아바타를 만들지 않는 미래의 역사, 그 지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전북교육의 수장으로서 ‘김승환’이라는 석자의 이름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