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아름다운 향기를 지녔지만, 나무는 향기가 없다. 나무는 키가 크지만, 꽃은 대지와 가까운 곳에 있다. 그 둘을 비교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대부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로 치부할 것이다. 하지만 왜 아이들은 어른의 잣대를 기준으로 삼고 비교를 하는 것일까.
나는 유년에 수없이 많은 비교와 함께 성장했다. 4남 1녀 중 넷째이자 큰딸이었기에 남자아이들과 노는 것이 편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선수로 생활했던 탓에 남자아이 같은 성격을 지니기도 했었다. 그런 나를 두고 어머니는 항상 동네 아이들과 비교했다.
“워매, 써글년! 쩌그 현미는 지그 엄니 따라 나와서 빨래허고 밭일도 허드라. 근디 너는 어째 맨날 모시마들하고 돌아댕김시로 지앙(사고)만 치고 댕기냐 가시낭년아! 니가 시방 고추라도 달려가꼬 그라믄 나가 뭐라고 허것냐? 고추도 없는 것이 어째 모시마 맹키로 천방지축잉가 모르것어! 인자 현미쪼까 따라 댕기믄서 배워라. 배워서 남 주것냐?”
어머니께서는 현미라는 친구처럼 다소곳하고 여자다운 딸을 원하셨다. 그 친구를 본받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 친구를 따라다니며 배우라는 그 말이 어린 내 자존심을 건들었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난 그 친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키도 그 친구보다 더 컸을 뿐만 아니라 성장도 빨랐다. 더군다나 사내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던 내가 그 친구를 괴롭히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동네에 내 또래 여자아이들은 모두 비교 대상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난 한없이 부족한 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멋진 여자아이였고 난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내아이도 계집아이도 아닌 중간이라는 생각에 또래 여자아이들 괴롭히는 것이 내 일과가 되어버렸다.
내가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아이들이 이제 자박자박 걷는 나이가 되었을 무렵. 어머니께 왜 그렇게 상처 받을 수 있는 비교를 했었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그것이 뭐시가 상처가 된다냐? 당연한 것이제. 너도 인자 엄마 됐응께 한 번 아그들 키워바야. 비교 안하고 키우믄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것다. 넘의 새끼들은 누가봐도 여자맹키로 크는디 내 새끼는 모시마잉가 가시나잉가 모르것는디 비교 안 하것냐? 긍께 너도 키워 봐. 그람 알제!”
어머니의 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어머니는 당연한 일이었고 정당한 일이었다.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었다. 어머니의 기준이었다. 어머니의 기준을 깨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난 아이들을 비교하며 키우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이들을 비교할 일은 없었다. 두 아이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 또래 아이들과 비교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아주 작은 생각의 차이였다. 있는 그 자체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비교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학교에서는 매일 가을 운동회 연습 때문에 늦게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들어오곤 하던 딸아이가 그날따라 일찍 집에 들어왔다. 다른 날 같으면 거실에 책가방 던지며 작업실로 들어와 운동회 연습하는 이야기, 준비하는 이야기를 쫑알거리며 전해주었을 딸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울적해?”
“엄마!”
“응?”
“난 왜 운동을 못 해?”
“누구나 운동 다 잘하는 것은 아니잖아. 대신 너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아이들 상담도 해주고 장점이 더 많잖아!”
“아니, 같은 식구인데 태훈이는 운동 잘하잖아. 그런데 나는….”
“왜 누가 뭐라고 했어?”
“오늘 청백 계주 연습했거든. 태훈이가 4학년 대표로 뽑혔어. 근데 3학년 백군이 반 바퀴 이상 차이가 나게 들어왔는데 바통 받은 태훈이가 청군을 따라 잡고 엄청나게 많은 차이를 벌려놓고 바통을 넘겼어. 그래서 백군이 이겼거든.”
“태훈이는 원래 운동 좋아하고 잘하니까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그게 왜?”
“그때 담임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야. ‘태훈이가 자영이 동생이지? 그런데 자영이랑 완전히 딴 판이네? 네 동생은 운동 엄청나게 잘하는데 넌 왜 그렇게 못하냐? 100m 달리기 꼴찌 면해본 적 없지?’ 그러시잖아!”
“한마디 해주지 그랬어?”
“했어! 서로 잘하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엄마가 항상 그랬잖아. 서로 잘하는 것, 못하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누구나 장단점은 지니고 사는 것이라고. 그래서 누구는 잘하는데 나는 못한다고 기죽지 말라고.”
“누구 딸인지 말 잘했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극과 극이라 도저히 남매라고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러시는 거야!”
“그래서 우리 딸 화났어?”
“화난 것은 아니고 난 왜 이렇게 운동에는 소질 없는 것인지 생각하니까 조금 우울해!”
“그건 담임선생님이 잘못 생각하신 거야. 같은 형제라고 모두 같을 수는 없는 거잖아. 같은 환경에서 자라는 소나무여도 어떤 소나무는 곧고 반드시 자라면서 아주 멋진 소나무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소나무는 초라하고 작고 뒤틀리면서 크기도 해. 하지만 작고 초라하고 뒤틀린 소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까? 아니 그 나름 귀하게 쓰이는 곳이 있어. 곧은 소나무는 가구를 만드는 데 유용하지만,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는 뒤틀린 소나무가 더 쓸모가 있는 것이거든. 그러니까 우리 딸 이제 그만 기분 풀어. 괜찮아 운동 좀 못하면 어때? 대신 자영이가 잘하는 것이 더 많잖아!”
“그래도 운동도 잘하면 좋잖아!”
“운동회 때는 그렇지? 하지만 뭐 운동선수 될 것도 아닌데 못해도 상관없지!”
“나 아빠 닮은 거 맞지? 엄마는 어렸을 때 운동선수였잖아.”
“대신 자영이 책 좋아하는 것은 엄마 닮았잖아. 열 세 살짜리 아이의 시가 시화로 제작되어서 책에 실린 사람 없잖아? 시인들과 이름이 나란히 실린 열 세 살짜리 아이는 없잖아? 자영이 밖에!”
그때야 딸아이는 생긋 웃었다.
딸아이가 내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몇 편의 시가 있었다. 시화시집을 만들고 있던 어느 지인이 시화시집에 자영이 시를 넣겠다는 연락이 왔었다. 두 말없이 허락했다. 아이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림=임솔빈)
어른들은 아이들을 비교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두 아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성격도 성향도 모두 다르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는 비교를 무심코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혹시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싶어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받았던 상처를 아이들이 받는다는 것이 싫었다.
“태훈이 봐라. 아르바이트해서 학교 등록금 내고 제 용돈 쓰는데 너는 누나면서도 주는 용돈도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면 되겠냐?”
남편이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광고공모전 때문에 방학 중에도 대전에 있어야 했던 딸이 모처럼 내려온 날이었다. 지쳐있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아이의 스트레스라도 줄여줄 수 있을까 해서 식탁에 앉아 딸아이의 대학생활과 자취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남편이 안방에서 나오며 던진 첫마디였다.
딸아이 눈에 억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딸아이의 학과 특성상 아르바이트할 시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딸아이 아르바이트하는 것은 내가 반대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요? 자영이가 아르바이트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태훈이는 학교도 빨리 끝나고 시간이 많지만, 자영이는 잠잘 시간도 없이 학교 공부하고 공모전 하고 학교 일보고 지쳐있는 아이한테 아르바이트하라고? 왜 애들을 비교하고 그래요? 나도 비교해 봐요? 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옆집 남자랑 비교 하는 것. 친구 남편이랑 비교하는 것이라면서요? 본인도 비교 당하는 것 싫어하면서…. 그런데 애들은 왜 비교하는데?”
“그게 아니라 생활비가 부족해서 겨우 차비만 들고 왔다고 하는 말이 좀 화가 나서!”
“생활비를 넉넉하게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학생이 공부하는 것이 정상이지. 아르바이트해서 생활비라고 보탤 수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그게 목적이 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엄마, 나 괜찮아. 아빠도 속상하니까 그렇지.”
“딸 아빠가 실수했어. 미안해. 아빠는 그냥 들어가서 잘게. 미안해 딸.”
“괜찮아 아빠. 주무세요.”
딸아이는 웃고 있었지만, 그다지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간 뒤 딸이 상처받지 않도록 달래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리고 딸에게 미안하고 무참해진 아빠를 달래는 것은 아들 몫이었다. 아들이 안방으로 들어가며 누나의 등을 토닥였다.
남편 뿐만은 아니었다.
시댁식구, 친정식구, 하물며 아파트 상가 사람들까지 대부분 사람들은 색깔이 전혀 다른 두 아이를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은 그다지 노여워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웃으며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었다. 누군가 딸아이의 장점을 부각시키며 아들과 비교하면 딸아이가 나서서 동생의 장점을 부각 시켜주었다. 반대로 누군가 아들의 장점을 딸아이와 비교하면 아들이 누나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그렇게 서로를 지켜주는 모습을 보며 안심했다.
두 아이는 성격, 체형, 취미, 운동신경, 생활신조 등 모든 면에서 전혀 달랐다. 꽃과 소나무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분명 남매이지만 얼굴 생김새부터 전혀 남달랐다. 두 아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비교해서 말할 수 있는 절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조건에서 아이들은 내가 함께 있을 수 없는 집 밖에서 많은 비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았다. 조금 마음이 상해서 우울해 하는 날도 있었지만, 상처까지는 되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부모의 비교다. 情, 사랑과 관련이 없는 누군가의 비교는 무시해 버릴 수도 있지만, 부모의 비교는 항상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이 아이들이다. 부모에게 받는 상처만큼 큰 상처는 없다.
나른한 오후
따뜻한 봄 햇살이 베란다로 마실 나오던 날. 한 잔의 커피로 오후를 즐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그래도 느그 둘째 오빠는 명절이라고 왔드라만, 느그 큰오빠는 코빼기도 안 보여야. 써글 놈 내가 느그 둘째 오빠한티 욕 먹음시로도 큰놈이라고 더 챙겼는디 어째 나한티 이렁가 모르것시야.”
“둘째 오빠 집에 왔다가 인천 올라갔어요. 근데 엄마, 둘째 오빠가 그러던데? 엄마가 둘째 오빠랑 큰오빠 비교만 안했어도 큰오빠랑 등 돌리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염병 허등갑다. 내가 지그들 잘되라고 그랑 거시제 나 좋자고 했가니?”
“엄마가 큰오빠는 대학 못 나왔는데 둘째 오빠 대학 가르쳤다면서 왜 큰오빠만큼도 못하냐고 했을 때, 둘째 오빠는 어떤 했을까요?”
“큰 성 하는 만큼은 해야것다 허것지!”
“아니, 대학 안 가고 돈 벌겠다고 했던 큰오빠가 너무 미웠던 거예요. 둘째 오빠는 형편이 안 돼서 못하는데 집에 잘하는 것 생색내는 큰오빠가 너무 미운 거예요.”
“그 놈이 못돼 처먹어서 글제 어째야!”
“엄마, 나도 그랬는데요? 예전에 동네 친구들이랑 비교하면서 말씀하셨을 때, 그 다음 날부터 그 애들 괴롭히는 것이 내 취미였잖아요.”
“우리 새끼들은 으째 근다냐?”
“아니, 누구나 다 그래요. 비교하면 본받아야겠다가 아니라, 그 비교 대상이 싫고 미워요. 반복되면 될수록 분명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거라고요.”
“염병허네 참말로. 긍께 너는 느그 새끼들 비교 안 허고 키울 수 있것디?”
“비교할 일이 없어요. 자영이가 잘하는 것이 있으면 태훈이도 잘하는 것이 있는데요?”
“너는 딸랑 두 놈잉께 글제. 네 놈, 다섯 놈 키워봐라. 니 맘대로 되능가.”
어머니의 노여움이 극에 치닫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더 대화가 계속될수록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을 해명하기 위해 화를 내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기분을 풀어드려야 했다.
결국, 둘째 오빠, 큰오빠도 어머니 마음에는 차지 않는 아들이 되었고 나는 아이들이 둘밖에 되지 않아서 비교하지 않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머니는 동네 누구네 아들은 돈 잘 벌어서 이번에 논 사주더라는 말로 다시 비교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같은 이야기였다. 다른 집 자식들은 못 먹고 못 배우고 컸지만, 부모에게 잘하고 우리 집 자식들은 공부 다 시키고 배불리 키웠어도 집에 잘 하는 놈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어머니와 전화를 끊고 나니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어머니께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는 것은 싫다.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싫고 내가 해 드린 것이 없어서 더 싫었다. 하물며 어린아이들이 비교당했을 때 받는 상처는 자라면서 더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오늘은 쓰디쓴 소주잔을 기울여 본다. 어머니의 한숨이 소주잔에 담겼다. 그리고 나의 상처를 소독하는 중이다. 어머니는 모두 꽃이기를 원한다. 나는 꽃이 될 수 없다. 타고나기를 나무로 태어났고 지금도 나무다. 난 어머니가 바라는 꽃이 될 수 없기에 오늘도 향기 진한 꽃과 비교당하며 꽃이 아닌 것을 자책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 아이들은 꽃이어도 좋고 나무여도 좋다. 그냥 그 나름의 향기를 지니고 살아가면 그뿐이다. 꽃인데 향기가 없으면 어떠한가. 나무인데 키가 좀 작고 구부러지면 어떠한가. 그 특성을 살려 마음껏 세상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을….
[작가 약력]
전남 나주 출생
전북 군산 거주
1995년~99년 소설창작모임 운영
2003년 수필집 [누룽지와 꺼먹고무신] 출간
2004년 월간 시사문단 시 등단
2004년 계간 대한문학세계 소설 등단
2011년 시집 [여백] 출간
2015년 현재
(사)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 이사
계간 대한문학세계 심사위원
대한 문예대학 강사
대한 시낭송가협회원
웹디자이너
홈페이지 : 설연화의 문학공간 (http://sichenji.com)
※ 설연화 작가의 [사고뭉치 엄마의 괴짜 교육법]을 연재 중입니다. 매주 월요일 새로운 글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