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늦게 경험할수록 좋은 것 중에 하나가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이다. 그것이 잠깐의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이별, 죽음과 연결이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아픔은 없을 것이다. 난 아이들이 가벼운 이별을 경험하고 헤어짐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어도 추억을 많이 간직한 주변의 어떤 이와의 영원한 이별은 성년이 되고 더 큰 후에도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원한 이별은 늦게 경험할수록 이별 후 상처를 다스릴 수 있는 의연함을 지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딸아이가 영원한 이별과 마주 선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초였다.
그때 사는 곳은 바다와 가까웠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산바람에 바다 냄새가 묻어 있는 곳. 창문을 열면 월명공원이 보이고, 조금 걸어가면 바다가 보이는 군산 내항이 있었다. 딸아이의 동선은 언제나 월명공원 근처였다. 심한 길치였던 딸아이는 자신이 아는 길 이외에는 쉽게 가려고 하지 않았다.
햇볕 가득 내리쬐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휴일이었다. 골목 바로 위쪽에 살던 셋째 오빠가 아파트로 먼저 이사를 했다. 집을 사는 것은 우리가 먼저 샀지만, 사정이 있어 1년 정도 이사를 미뤘고 그사이에 오빠는 같은 아파트 앞 동에 집을 샀다. 외사촌들도 이사를 가 버리고 심심했던 딸아이는 반 아이들과 제법 잘 어울렸다. 1학년 때부터 거의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던 몇몇 아이들과 바다 근처까지 어울려 다니는 것 같았다.
“엄마! 애들이랑 부둣가 가서 놀다 올게. 태훈이는 엄마가 좀 놀아줘!”
“그래 알았어.”
아이가 나간 뒤 창문으로 바라보니 두 명의 사내아이와 딸을 포함해서 세 명의 여자아이. 다섯 명이 뭐가 신나는지 쫑알거리며 부둣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길을 걷다가 자그만 깡통 하나를 줍는 딸아이가 보였다.
‘물 조심 하라고 할 걸 그랬나?’
내심 걱정이 되었다.
군산 내항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북적거렸다. 장항을 오가는 연락선이 매시간 운행되고 있었기에 상가를 비롯해 횟집, 노점상이 언제나 즐비하게 늘어져 바다를 파는 곳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많으니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하는 마음에 아들아이 간식을 내어주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이들이 나간 지 그다지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길 건너편에 있는 소방서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구조나 화제 때 울리는 벨 소리였다. 15년 전 월명공원 근처에는 소방서, 상공회의소, 군산의료원, 시청, 법원 등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군산항이 군산의 요충지였음 느낄 수 있는 구조이기도 했다. 소방서의 비상 벨 소리나, 경보 소리는 매번 듣는 소리라 무신경하게 넘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심때가 넘었지만, 딸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일요일이면 우리 집에서 지내는 현수(가명)는 부둣가에서 만나기로 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현수의 부모님이 시청 근처에서 자그만 가게를 하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점심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집에 와서 놀아도 된다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아이나 다름없었다. 일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갈 때도 현수는 함께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부둣가로 난 창문을 기웃거렸다. 오는 모습이 보이면 간식이라도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난 아들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나 부둣가에 갔는데, 오지를 않네? 무슨 일 있나? 엄마랑 부둣가 갈까?”
“응! 누나 친구들이랑 게 잡는다고 했어!”
“그래?”
난 아들아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학교 정문을 지날 때였다. 부둣가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이 보였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걷는 것이 아니라 발을 끄집고 있었다. 누군가는 구급대원 등에 업혀 오는 것 같았다. 딸아이는 연신 뒤돌아 부둣가를 바라보았다.
놀란 마음에 아들아이와 함께 뛰었다. 딸아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딸아이는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대답이라도 듣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머리끝이 쭈뼛하게 서는 것 같은 싸늘함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구급대원을 바라보았다.
“같이 있던 아이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아이는…."
"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혹시 현수라는 아이 부모님 연락처 알고 계십니까?“
“혀…현수라고요?”
“네, 김현수. 아이들과 같은 반이라고 하던데…."
"저기 중앙로에서 작은 옷가게 하시는데. 연락처는 몰라요. 현수만 저희 집에 오갈 뿐이고, 부모님을 뵌 적은 없어요.”
“그럼 이 아이들의 부모님은 연락처 아시나요?”
“다 이 근처 살아요.”
“아이들이 충격을 받아서 며칠은 치료를 받아야 할 텐데, 부모님들께 말씀을 직접 전해야 하거든요. 아이들이 전화번호를 생각하지 못하네요. 하긴 무리도 아니죠. 보는 앞에서 친구가….”
그는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그 상황을 다시 생각해 낼까 걱정을 하는 탓이었으리라. 난 딸아이를 등에 업었다. 아이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슈퍼마켓 앞 평상에 아이를 내려놓고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사정 이야기를 하자 주인아주머니는 아이들 얼굴을 살피더니 수첩을 뒤적거렸다. 대부분 동네 아이들이기에 누구 집 아이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딸아이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감각으로 까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 제 누나 옆에 앉아 누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난 딸아이를 품에 안았다.
“네가 잘못 한 것이 아니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
딸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잠시 후 소리 없는 눈물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무엇이라 말을 건네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말로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지 답을 찾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아이가 어떤 생각도 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에 이부자리를 펴고 딸아이를 눕혔다. 아무런 저항 없이 딸아이는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 그래야 조금 속이라도 시원해지지.”
딸아이는 한참 동안 우는 것 같았다. 가끔은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가끔은 조용히 어깨만 들썩이기도 했다. 얼마나 울었던 것일까.
딸아이가 이불을 걷더니 이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엄마, 무서웠어. 물에 빠져서 팔을 흔들면서 살려달라는 것 같았어. 그리고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울고 있었어. 얼굴은 새파랗게 변하는 것 같았어. 근데 울고 있었어. 근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아니 어른들한테 도와 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어.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엄마! 무서워. 현수가 도와주지 않았다고 슬퍼할 것 같아!”
사람은 이럴 때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었다. 울 수 있어 다행이었고, 사고 상황을 말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물에 빠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자영아, 그건 네가 구해주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잖아. 어리니까 방법을 몰랐고, 방법을 알고 있더라고 힘이 부족해서 할 수 없었던 것이었잖아. 거기다가 너도 그런 모습 처음이라서 놀라고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잖아. 그러니까 자영이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은 놀란 마음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서움만 있을 거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거기 서 있었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야. 어른도 하지 못하는 것을 자영이가 어떻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자신을 탓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 자꾸 현수가 날 바라보던 모습이 생각 나. 울고 있었는데….”
“난 지영이가 좀 잤으면 좋겠어. 엄마가 안아 줄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엄마가 옆에 있을 테니까.”
간난 아이 안듯 무릎에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서럽게 한바탕 울다 지쳐 잠이 든 딸아이를 바닥에 눕히고 작은 방 창밖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직 한 아이의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다. 구급대원이 사내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물에 빠진 것처럼 구급대원 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 아이가 언제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창밖을 봤을 때, 평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딸아이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를 몇 번인가 반복했다. 일어나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울다가 내 품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그렇게 무서운 밤이 지나고, 딸아이는 다음 날 아침 병원을 찾았다. 아이에게 큰 이상은 없을 것 같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지금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단계라고 했다. 병원에서 딸아이가 의사와 상담하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어떻게 사고가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딸아이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사고 상황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애들이랑 길에 올라온 게를 잡고 놀았어요. 그런데 현수가 스티로폼 상자를 하나 들고 왔어요. 작년 여름에 외갓집 갔을 때 개울에서 그거 타고 놀았는데 재미있었대요. 그래서 나랑 다른 친구가 물에 빠지면 죽는다고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현수가 스티로폼을 선착장 물가에 놓고 그 위에 앉았어요. 손으로 바닥을 살짝 밀어주니까 스티로폼이 바다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현수가 스티로폼에 물이 들어온다고 하면서 손으로 바닷물을 저어서 선착장으로 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딸아이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의사는 딸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자영아,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기억하지 않아도 돼! 다만, 자영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무서워하기만 하면 심장에서 검은 그림자가 생겨서 더 힘들어지거든. 선생님이 미안해. 자영이 힘들게 해서.”
“그런데요. 현수가 바다에 들어갈 때, 배가 하나 지나갔거든요. 근데 현수가 다시 돌아오려고 할 때 조금 큰 파도가 밀려왔었어요. 그러면서 스티로폼이 뒤집혀서….”
자영이와 상담 의사는 그렇게 몇 시간 이야기하고, 음료수를 마시며 친구와 이야기하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자영이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다음 날
PC 통신 소설동아리 방에 일요일의 사고소식을 올리며 먹먹한 마음에 심호흡을 크게 내리 쉬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현수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니 나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져 모니터가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닦고 먼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구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조용히 학교 운동장에 들어섰다. 현수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일요일은 아침 일찍 집에 와서 저녁 늦게 돌아가던 아이였다. 나와 보냈던 추억도 많았던 아이의 마지막을 창밖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눈물을 닦고 밖으로 내려갔다. 주인아주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내 손을 잡았다.
“자영이 엄마도 마음 아프지? 자영이네 집에서 살다시피 했잖아.”
“네, 많이 아프네요. 서글서글한 웃음이 참 예쁜 아이였는데….”
“올 때마다 자영이 준다고 아이스크림 사서 올라갔었는데, 아이들 부모는 아이가 눈에 밟혀서 어찌 살아갈까 싶네.”
30분쯤 지나자 영구차는 다시 학교 운동장을 빠져나와 의료원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길을 가는 현수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작별 인사 밖에는….
“잘 가라 현수야. 너 때문에 아줌마가 많이 행복했었어. 고마워!”
그렇게 현수는 떠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수라는 이름도 잊혀갈 무렵이었다. 아파트로 이사해야 했다. 자그만 전셋집이었기에 짐이 많지 않은 터라 직접 이삿짐을 쌌다. 아이들 방에 있는 옷가지며 속옷을 박스에 넣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현수의 옷 몇 개와 모자가 있었다. 집에서 놀다 옷이 젖거나 입지 못할 상태가 되면 아들아이 옷을 입혀서 보내곤 했다. 그때 벗어 놓고 간 옷 몇 벌이 우리 아이 옷처럼 옷장에 그대로 있었다.
딸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일찍 왔다. 며칠은 오빠 집에서 학교 보내기로 하고, 이사하기 전에 아이 전학부터 서둘렀었다. 그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서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딸아이는 내 손에 쥐어진 옷을 보며 내 옆에 앉았다.
“현수 옷이네? 현수 하늘나라에서도 잘 있겠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응? 그래…. 잘 있을 거야.”
“현수 이 옷 입고 우리랑 수돗가에서 장난치다가 옷 버려서 태훈이 옷 입고 집에 갔었지?”
“그랬지.”
“이 옷 입었을 때 진짜 귀여웠는데. 태훈이보다 더 작잖아.”
“그랬지.”
딸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볼 수 없는 아이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인지, 그 아이 엄마 마음을 알 것 같아 마음이 아팠는지 알 수 없는 통증이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딸아이는 현수 옷을 제 책가방에 넣었다.
“뭐 하려고?”
“엄마가 그랬잖아.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고 싶은 편지는 태우면 된다고. 그래서 있다가 학교 소각장에 가려고. 내일 전학 가니까 현수 생각나서 편지 썼거든. 그거랑 이 옷이랑 태우면 현수가 받아 볼 수 있잖아.”

(그림=임솔빈)
딸아이는 별 이상이 없다지만 한동안 우울해 했다. 웃음기도 없었고, 물 근처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편지였다. 현수에게 미안하다는 말하고 나면 아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편지를 쓰게 했다. 하늘나라에는 주소가 없으니까 보내고 싶을 때 태우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편지가 하늘나라 우체통으로 들어간다고.
가끔 편지를 써서 태워 달라고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편지 태워달라는 이야기가 없기에 쓰지 않은 줄 알고 있었다. 자영이는 학교 소각장을 알고 난 후 거기에서 편지를 태우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편지 뭐라고 썼는데?”
“나 전학 간다고, 다음에 나 보고 싶으면 문화초등학교로 오라고 편지 썼어.”
자영이 가슴에 현수는 아직 친구였다. 미안함을 안고 살아야 하는 친구로 아직 자영이 가슴에서 추억과 함께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딸아이 기억 속에 현수는 없다. 아파트로 이사 온 후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현수뿐만 아니라, 이전 초등학교 친구들도 잊어 가고 있었다. 일부러 이사한 것은 아니지만, 딸아이에게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적절한 시기에 잊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 같아 다행이었다.
가슴에 쌓아두면 무엇이든 탈이 생기는 법이다. 어른이나 아이나 가슴에 응어리진 것을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어둠에 잠식되고 만다. 그러나 누군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고,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두려워서 밖으로 뱉지 못한 이야기. 가장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글이다. 처음엔 낙서처럼 끄적거리던 것이 어느 순간에 내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마음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알았다. 글로 내뱉는 것도 마음의 치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어린 나이에 영원한 이별과 마주했던 딸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응어리를 풀 수 있는 편지였다. 이별을 막아주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상처를 닦아 줄 수 있고, 치료해 줄 수 있기에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에 아픔도, 상처가 추억이 될 수 있었다.
“엄마! 나 남자친구랑 헤어질까?”
“왜 또?”
“요즘 좀 이상해. SNS에 접속은 되어 있는데 내 메시지는 안 읽어. 이상해!”
“아이고,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또 울고불고 난리 한바탕 치르시게?”
“그러고 나서 노트 한 권 욕으로 채워주지 뭐. 그럼 속 후련하잖아!”
딸아이는 생긋 웃었다.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있는 아픔을 쏟아 버리기 위해 가르쳐 준 글쓰기로 마음 풀기를 엉뚱한 곳에 응용하고 있는 딸아이를 보며 난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는 듯 뒷목을 움켜쥐었다. 딸아이 웃음에 해맑은 장난이 묻어 있었다. 예쁘다. 그 환한 웃음이….
[작가 약력]
전남 나주 출생
전북 군산 거주
1995년~99년 소설창작모임 운영
2003년 수필집 [누룽지와 꺼먹고무신] 출간
2004년 월간 시사문단 시 등단
2004년 계간 대한문학세계 소설 등단
2011년 시집 [여백] 출간
2015년 현재
(사)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 이사
계간 대한문학세계 심사위원
대한 문예대학 강사
대한 시낭송가협회원
웹디자이너
홈페이지 : 설연화의 문학공간 (http://sichenji.com)
※ 설연화 작가의 [사고뭉치 엄마의 괴짜 교육법]을 연재 중입니다. 매주 월요일 새로운 글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