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LOGO
최종편집: 2025-05-12 00:31:39

생각의 차이


... 편집부 (2015-08-16 22:43:04)

IMG
엄마들의 가장 큰 소망은 아이들과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낼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자라 성인이 되었을 때, 엄마와 함께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엄마이기를 소망한다. 누구나 딸과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쇼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공유하고 고민을 공유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을까? 생각마저 친구가 될 수 있는 엄마와 아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이들 어렸을 때 권위적인 엄마였다가 성인이 되었다고 바로 친구처럼 바뀔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아이들 유년 때부터 아이의 눈높이에서 생각하는 것을 길들여야 한다. 아이들도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엄마의 몫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생각의 차이로 판가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철없는 엄마다.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과 같이 생각하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줄 수 있는 엄마. 그리고 아이들 성장과 함께 엄마의 생각도 성장하는 것처럼 느껴져야만 진정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

“엄마, 아이들이 계곡 가자는데? 1박 2일로.”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다. 언제 가자는데?”
“7월 마지막 주. 우리가 모두 준비할 테니까 엄마는 그냥 같이 가기만 하면 돼!”
“작년처럼 엄마는 그냥 따라만 갈 거야.”
“올해는 엄마도 물에 들어가야 해! 작년처럼 밖에서 보고만 있는 거 별로였어. 엄마 물놀이 좋아하잖아.”
“근데 좀 그러네? 올해는 너희끼리 가면 안 될까?”
“아니, 친구들이 엄마랑 같이 가야 한대. 그래야 더 재미있고 신 난다고. 작년에 재미있게 놀았잖아.”
“엄마도 재미있었지. 근데 아빠가 올해도 철없는 엄마라고 또 뭐라고 할 것 같아!”
“그건 아빠가 같이 못 놀아서 짜증이 난 거야! 그러니까 같이 가는 걸로 이야기할게!”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아이들이라 날짜 맞추는 것이 무척 어렵다. 그럼에도 일사불란하게 날짜를 맞춘 것 같다. 벌써 민박집 예약이 끝나고, 회비를 걷고 여름 피서 준비가 끝나가는 모양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함께 어울리는 아이들의 생각이 아니었다. 항상 남편이나 친정어머니는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 어울리는 나를 나무랐다. 엄마의 권위와 위치를 지켜야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고, 아이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이들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생활해야 그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조언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존경은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그들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때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이들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었다. 친정아버지 생신 때쯤 고향에 내려갔다. 11월 초순이라서 날씨는 쌀쌀해지고 계절이 묵은 옷을 벗느라 마당은 온통 낙엽으로 가득할 때였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방에서 뒹굴고 있었다. 지금은 시골집 마당이 모두 시멘트로 발라져 있어 흙을 볼 수 없지만, 그때는 흙이었다. 난 동생을 데리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자치기 할 때는 탱자나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아이들에게 자치기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았으나 탱자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탱자나무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동생이 생각난다는 듯 나를 끌었다. 우리 동네와 앞 동네 중간쯤 대나무밭을 두르고 있는 것이 탱자나무였다.
가져간 톱으로 반듯하고 긴 탱자나무 가지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잔가지와 가시를 모두 다듬어 놓으니 자치기 하는 나무로 적당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자치기 순서가 생각나지 않았다. 뜨기, 치기, 한 손 치기, 돌려치기, 코치기, 다리 껴 코치기….
하다가 보니 순서가 하나씩 생각나고 방법이 생각났다. 동생과 아이스크림 내기를 하며 일단 시작했다. 내 생각대로 아이들이 모두 우르르 몰려나왔다. 여덟 명이 평상에 앉아 동생과 내가 자치기 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편을 가르고 있었다.
“우리 편 다 나눴어요. 우리도 할 거에요. 우리는 삼촌 팀!”
“난 엄마 편!”
“그냥 하면 재미없는데? 그럼 용돈 얼마씩 걷어. 그래서 그걸로 영산포 가서 통닭 사오자! 이긴 편은 돈 다시 가져가고 진 편 돈으로 사는 거야!”
“누나 첫 판은 그냥 연습게임!”
“그러자. 그런데 졌다고 울고불고하는 사람은 다른 시합에서 뺄 거니까. 졌다고 울기 없기다. 알았지?”
여덟 명은 동시에 대답했다.
“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놀이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다. 아이들에게 순서를 가르쳐 주고 자를 재는 방법과 공격하는 사람이 죽는 경우, 이기는 방법 등을 설명했다. 그러나 너무 길었던 탓일까? 아이들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누나, 그냥 일단 해! 그럼 애들이 자연스럽게 알겠지!”
“그럴까? 그럼 몇 자 내기할래?”
“우선 연습게임이니까 30자 내기!”
“너무 많지 않아?”
“일단 해 봐!”


(그림=임솔빈)


아이들에게 순서를 가르쳐주기 위해 제일 먼저 내가 나섰다. 동생은 뜨기를 하려고 준비하는 내 자세와 어미 자의 위치를 보고 자리를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뜨는 척하며 왼쪽으로 떠서 멀리 보냈다.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와~!”
“아무도 못 받았지? 내가 보기엔 저거 20자 나와! 20자!”
“뭐야! 그냥 한 판으로 끝나게 생겼는데? 우리는 수비만 하다가…. 근데 20자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럼 재 봐야지!”
어미 자의 크기가 한 자로 친다. 내가 스무 자를 불렀지만, 겨우 18자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효가 되고,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다. 동생 편에서는 아이들이 먼저 시작했다. 받을 수 있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아이들은 치수를 제대로 재지 않는다며 서로 재보겠다며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 지르며 아우성이었다. 동네 나갔다가 들어오시던 어머니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어이구 에미가 돼서 자알 헌다. 니가 시방 아그들하고 그러고 놀 나이냐?”
“엄마, 애들한테 가르쳐 주고 있는 거예요.”
“아그들이 참 좋은 것 배우것다. 나이는 똥구멍으로 쳐묵었는갑서. 어째 저렇게 철이 없는가 모르것어. 저그 죽산댁네 영자도 아그들하고 왔는디, 고상허게 아그들이랑 책 보믄서 그라고 놀드라.”
“책은 집에서 보면 되는 것이고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흙에서 놀아보겠어요. 학교 운동장 아니면 흙을 밟아볼 일도 없는데. 이럴 때나 흙에서 같이 노는 거죠.”
“말이나 못허믄…. 속창아리 없이 아그들하고 그라고 있지 말고, 오늘 동창 장이어야. 느그 아부지 산낙지 좋아하시는디 가서 낙지나 댓 마리 사오니라. 아그들이랑 묵게!”
“애들이랑 하던 것만 마저 하고요!”
“워매 내가 속터져 죽것어. 아니 시방 니가 아그들이랑 자치기허고 노는 것이 중요허냐? 어째 어릴 때나 지금이나 저렇게 철이 없는가 모르것어 참말로, 속터져 죽겄네.”
어머니의 큰소리에 남편이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동생도 난처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큰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남편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처남이랑 둘이 차로 얼른 다녀와. 애들 노는 것은 내가 봐주고 있을 테니까. 그냥 옆에서 어떻게 하는 것만 가르쳐 주면 될 것을….”
동생과 나는 씁쓸하게 뒤돌아서야 했다.

면 소재지에서 오일장이 열렸다. 어차피 나온 김에 아이들 간식거리와 어머니의 주문하신 산 낙지까지 사서 집에 돌아오니 이미 게임은 끝났다. 아이들도 재미없는지 한 게임만 하고 모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에만 있는 애들 겨우 밖으로 불러냈는데….”
“날씨도 쌀쌀한데 그냥 애들 방에서 놀게 둬.”
“그럼 시골에 온 보람도 없고, 애들한테 추억도 없잖아. 집에서도 항상 방에서만 노는데….”
연습게임에서 끝나버린 탓에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연습게임 했으니 튀김 닭 내기 게임을 하자고 했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의 성화에 아이들과 점심을 먹고 밭에 나가 잠깐 일을 했다. 다시 들어와 보니 아이들은 그저 방에서 어른들 몰래 화투로 짝 맞추기 게임을 하며 깔깔거렸다.
어머니께서 안방으로 들어가신 것을 확인했다.
“너희 비석치기 알지?”
“네!”
“해 봤어?”
“텔레비전에서만 봤어요.”
“할머니 몰래 창고 앞으로 가. 거기서 비석치기 하는 것 알려줄게!”
“추운데….”
“놀다가 보면 안 추워. 재미있는데…. 아까 튀김 닭 내기했던 것 이번에 하자 할머니 방에 들어가셨으니까 창고 앞에는 나오지 않으실 거야. 가자!”
아이들은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동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나오지 않는다면, 창고 앞으로 지나갈 일은 없었다. 창고는 동네 입구에 있었고, 마을은 창고와 반대쪽에 있었다. 아이들과 우선 개울가에서 납작한 돌을 고르게 했다. 나는 조금 묵직하고 크고 한쪽이 평평한 돌을 골랐다. 동생은 나와 비슷한 돌을 고르고 아이들에게도 돌 고르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누나 이러다 엄마한테 걸리면 진짜 이번에는 부엌 빗자루 날아오겠다.”
“잔소리 좀 듣겠지. 아까 자치기 계속했으면 애들 진짜 재미있어 할 것 같지?”
“나 어릴 때 상진이 형이랑 그거 밤늦게까지 하다가 엄마한테 엄청나게 혼났었지. 처음엔 별것 아닌 것 같은데, 하다가 보면 오기가 생기잖아.”
“지면 더 하지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거든! 한 번이라도 이겨보고 싶거든!”
아이들과 다시 편을 나누고 비석치기의 규정을 정했다. 놀이하다가 보면 시비가 생기기 마련이다. 일어날 수 있는 시시비비에 대해 미리 규정을 만들어 놓는 것이 더 재미있게 노는 방법이었다.
“일단 첫 번째는 던지기. 선 그어 놓은 곳에서 세워놓은 비석을 맞춰서 넘어지면 이기는 것이고, 안 넘어지면 지는 거야. 우리가 지금 다섯 명씩이잖아? 동시에 하는데, 만약에 태훈이가 비석을 못 넘어뜨렸잖아? 그럼 다른 사람 것 넘어뜨린 사람이 태훈이가 못 한 것 대신할 수 있는 거야. 세워진 비석 다 쓰러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고. 단계별로 이름만 가르쳐 줄게. 그럼 어떻게 하는지 대충 알 거야. 두 번째는 세 발 뛰어차기, 세 번째는 도둑 발, 네 번째는 발 사이에 넣고 뛰는 토끼뜀. 다섯 번째는 오줌싸개. 무릎 사이에 비석을 넣고 걸어가는 모습이 오줌 마려운 것 같은 모습이어서 오줌싸개라고 해. 그리고 여섯 번째가 애 낳기. 똥꼬에 비석을 껴서 걸어간 다음에 뒤돌아서 비석을 맞추는 거야. 애 낳는 것이랑 비슷하지? 그다음에는….”
나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할 때 했던 놀이어서 단계가 위로 올라갈수록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언제 왔는지 남편이 벽에 기대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배사장, 신문팔이, 훈장, 목치기, 떡장수, 봉사하면 다 끝나. 그런데 봉사까지 갈 수 있겠어?”
“그거 눈감고 가서 비석 맞추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다섯 명씩이나 되니까. 내가 봤을 때는 오줌싸개나 가면 다행이겠다. 그 전에 장모님 날벼락이 먼저 떨어질 것 같아!”
“그럼 당신이 망봐요. 엄마 소리 나면 나는 안 하고 애들 가르쳐 주는 것처럼 하면 되잖아요.”
난 일단 남편을 공범으로 만들었다. 남편은 보는 것만으로도 추억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어느새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이들은 세 번째 단계인 도둑 발에서 모두 실패했다. 한쪽 발등에 비석을 올리고 조심히 걸어가서 비석을 쓰러뜨려야 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걸어가면 발등에서 비석이 흘러내렸다. 대부분 뒤처리는 동생과 내 몫이 되었다. 아이들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점점 능숙하게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고샅을 맴돌아 온 마음을 떠돌고 있었다. 멀리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남편의 손에 비석을 쥐여주고 벽에 기대어 섰다.
“저녁 준비 안 허고 뭣허냐? 시방, 워매 참말로 뭔일인가 모르것어!”
“엄마, 난 안 해요. 임 서방이 하고 있잖아요. 난 옆에서 가르쳐 주고만 있어요.”
“내가 니 머리 꼭대기에 있다잉. 지금까지 니가 했을 것이여. 내가 보잉께 임서방이 하는 척 하는 것이제? 아그들 저녁해서 맥일 생각은 안 허고 시방 이라고 있어야 것냐?”
“올케언니들 있잖아요.”
“언능 가서 못 허냐? 같이 혀야제. 너는 아그들하고 놀고 올케들만 시키믄 되것냐?”
그날 밤.
난 어머니께 꾸지람을 밤새 들어야 했다. 어머니 말씀은 어른의 권위를 가지라는 말씀이었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지만, 정도가 있어야 하고,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알려주는 것이 좋지만, 방법이 틀렸다는 말씀이었다. 어른의 체통을 지키라는 말씀이었다. 내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 변명을 한다면 머리라도 쥐어박을 분위기였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내가 철없다고 느끼셨던 것 같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지난 작년 아버지 생신날.
온 가족이 모였다. 잔디가 깔린 앞마당에서 가족이 모여 고기를 구워 먹고 있을 때였다. 딸아이와 아들아이가 옆에 앉아 고기를 싸서 먹여주기도 하고, 장난하며 꽃 돼지라며 나를 놀렸다. 내가 삐친 척 입을 삐죽거리자 아들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우리 여사님 또 삐쳤네. 여사님 사랑합니다. 그러니 노여움 거두시지요!”
어머니는 나와 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느그들은 지금까지도 한 번도 저렇게 해 본 적 없지야? 다 큰 아들이랑 어매랑 장난하믄서 맥여주고, 안아주고 보기는 좋다잉. 우리 새끼들은 잔정이 없어서 키우믄서 저런 거는 한 번도 못 봤응께!”
그때 딸아이가 벌떡 일어나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머니 귀에 뭐라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셨다.
“긍께 나도 느그 엄니 어릴 때는 많이 놀아준 것 같은디, 어째 저렇게 멀뚱거린가 모리것다. 잔정이 없어서 그럴 것이여!”
어머니는 부족한 채소 가져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한없이 작아 보이는 어머니셨다. 난 딸아이에게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할머니께 뭐라 했어?”
“응? 엄마가 철없는 엄마라서 우리가 안 챙기면 삐친다고 했지. 어릴 때는 엄마가 우리랑 놀아줬으니까. 이제 우리가 엄마랑 놀아 줄 때라서 엄마 달래줘야 한다고 했어!”
“엄마 흉봤구나?”
“뭐 흉인가? 칭찬인가? 그건 뭐 할머니가 판단하시겠지?”

지금까지 어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아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안아보고, 농담하며 장난을 해본 적도 없다. 어머니는 언제나 무서운 분이셨고,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먼 거리에 서 계시는 분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아 본 것은 어머니께서 병원에 누워 의식을 찾지 못하실 때였다.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때 처음 어머니의 거친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겁이 덜컥 날 정도로 차가운 손이었다.
어머니 말씀처럼 잔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곁을 내주시지 않고 언제나 먼 거리에서 채찍질만 가하셨던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먼저 손 내민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께는 내가 먼저 손 내밀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안아보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어색함에 더욱 다가서기 힘들었다. 그래서였다. 난 어머니와 같은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힘겨울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어깨이며 가슴을 지닌 엄마가 되고 싶었다. 울고 싶을 때 엄마를 찾기보다 가슴에 꼭꼭 쌓아두어야 했던 내 가슴앓이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너희 딸이랑 너랑 어쩌면 그렇게 대화도 잘 통하고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 같아. 진짜 부럽다. 우리 딸은 영화보고 쇼핑 같은 것은 같이하는데 너희 딸처럼 고민 같은 것은 이야기는 안 하던데…. 나도 그런 딸 있었으면 좋겠다.”
몇몇 친구들 말에 내 대답은 하나였다.
“아이들 어릴 때, 아이들 눈높이에서 함께 놀아줬어? 아이들이랑 소꿉장난해봤어? 아이들이랑 종이 인형 옷 입히고, 같이 공기놀이하고, 딱지 접어서 같이 딱지치기도 하고…. 갑자기 애들이 어른 됐다고 나랑 놀자. 하면 놀겠냐? 대화도 매일 수다 떠는 사람이랑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엄마랑 놀아봤어야 어른이 되어서도 노는 방법을 아는 것이지.”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다. 아이들이 보는 나도 이제야 성인이 되었다. 이제 얼굴 보기도 힘든 아이들과 마주했을 때,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남자친구, 여자친구 이야기, 회사 이야기, 미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지금 안고 있는 고민…. 어릴 때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고민은 엄마와 이야기하는 것으로 풀어갔던 아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엄마와 함께 고민한다. 답을 찾지 못해도 상관없다.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보다 먼저 살아 본 사람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면 아이들 스스로 답을 찾는다.

세상 살아가는 데 답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적어도 틀린 답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작은 생각의 차이다. 내 할 일이 있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지라도 아이의 입장이 되어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이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엄마. 아이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을 때, 해결해 주기보다 함께 고민하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방향을 가리켜 주는 엄마.
이제는 내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내 안에 있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이야기할 때, 아이들에게 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고민을 이해하고 이십 대의 시각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답은 찾지 못할지라도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이 아이와 친구가 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작가 약력]
전남 나주 출생
전북 군산 거주
1995년~99년 소설창작모임 운영
2003년 수필집 [누룽지와 꺼먹고무신] 출간
2004년 월간 시사문단 시 등단
2004년 계간 대한문학세계 소설 등단
2011년 시집 [여백] 출간
2015년 현재
시낭송가
웹디자이너
홈페이지 : 설연화의 문학공간 (http://sichenji.com)

※ 설연화 작가의 [사고뭉치 엄마의 괴짜 교육법]을 연재 중입니다. 매주 월요일 새로운 글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