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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5-05-12 09:57:27

버려진 지하도보, 청소년카페로


... 문수현 (2015-05-11 11:22:52)

화창했던 주말, 경기도 고양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지하철 3호선 종착역인 대화역 부근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귀향길 대중교통편은 자연스레 고양화정버스터미널을 이용하게 됐다.

전주로 내려오는 저녁 7시30분 막차를 예매하고 나자 1시간쯤 여유시간이 생겼다. 애매한 시간이다. 저녁은 먹었으니 터미널 주변을 한 바퀴 돌아봤다. 그러다 화정역광장의 지하도 입구의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화정 청소년카페 톡! 톡! 톡!”

궁금했다. 도시의 지하도에 대한 인상이 스쳐갔다. 대도시의 지하철 입구, 지하상가, 내가 사는 전주시의 버려진 지하보도들...



계단 안쪽을 바라보니 불이 켜져 있다. 일요일 오후인데 문이 열린 건가? 이내 알게 됐지만 화정청소년카페 톡톡톡은 청소년들을 위한 배움터이자 놀이터여서 주말에 오히려 활발히 운영된다.

하지만 다시 잠시 망설여졌다. 청소년들만의 공간이라면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걸까, 불청객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하도 입구를 살펴보니 다행히 ‘지역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고 안내돼 있었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과연 이런 공간을 이용하기나 할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짧은 시간에 왜 그리도 꼬리를 문 걸까? 어쨌든 한 번 살펴보고 싶었다.

지하 풍경은 상상과 달랐다. 189제곱미터의 넓은 공간에 밝은 조명, 안이 들여다보이는 넓은 창으로 분리한 서로 다른 용도의 크고 작은 방들, 무엇보다도 두서넛씩 모여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30여명의 10대 청소년들... 북카페 형식의 카페에선 커피를 비롯한 음료들이 주방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공간은 쾌적했고 분위기는 진지하면서 생동적이었다. 게다가 분명 체계가 있었다.

처음 이 공간은 시민들이 통행하는 지하보도였는데 2010년도에 횡단보도가 생기면서 버려졌다. 국회 심상정 의원이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자고 제안했고 도움도 줬다. 지난해 3월에 틴쿱이 결성되고 마침내 6월에 카페 문을 열었다. 현재 조합원은 150여명이다.

지난 1년 동안 25개 이상의 프로그램에 3천여 명이 참여했다. 올해 청소년프로그램들도 다양하다. 도시 농부, 바리스타, CSI 수사대 등 30여 가지 직업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영상동아리와 댄스동아리, 직업체험동아리 등 원하는 동아리를 결성·신청해 활동할 수 있다.



범기의 ‘웹툰읽기’, 동화의 ‘플로리스트 세계체험’, 영호의 ‘학습멘토’, 기타 고민상담 등 다양한 멘토링 프로그램도 이 지역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사실은, 이런 일을 하는 화정 청소년카페를 고양시의 도움을 받아 틴쿱(teen_coop)이라고 하는 청소년협동조합이 운영하고 있으며, 더욱이 청소년들이 청소년운영위원회를 만들어 자율적으로 운영을 책임지며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시스템을 탄탄히 하기 위해서일까, 청소년이 틴쿱 조합원의 반 수 이상을 유지하도록 정해두고 있었다.

청소년이 아닌 방문자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고, 한 청소년이 맞아주었다.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는다. 지방에서 왔다고 하니 무슨 일로 고양까지 왔는지 묻는다. 자녀는 있는지 묻는다. 청소년기를 보낸 적이 있으니 협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는 안내도 해준다. 내가 10대가 되어 어른에게 상담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긴 시간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남은 시간은 길어야 20분. 막차를 타야 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자료를 챙겼다. 청소년이 내게, 방금 인쇄소에서 가져온, 틴쿱 청소년운영위원회가 만드는 청소년 신문 ‘Talk Talk Teen_Paper’ 창간준비호 한 부를 접어 건네줬다.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전주 도심의 음산하게 버려진 지하보도들과, 문화의 도시에서 갈 곳 없이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겹쳐져 자꾸만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