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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5-08-18 13:42:23

뜨거운 여름 나리꽃


... 편집부 (2016-07-28 10:4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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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고추 한 포기가 몸을 누이고 있다. 조심스레 일으키고 적당한 돌멩이를 골라 기대 주었다. 봄날 한시에 씨를 묻었지만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고추들은 키가 제각각이다. 제 키를 미리 가늠할 수 있는 생명은 아무 것도 없지만 고춧대의 다양한 키는 전혀 불협화음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햇볕자리를 다투기는 해도 조화로운 아름다움이 오히려 빛난다.

산골로 이사를 온 이후로 해마다 텃밭에 씨앗을 묻는다. 올 봄, 작은 마당에 고추와 옥수수, 박과 호박 등속을 심느라 부산을 떨었던 것이 엊그제인 듯한데 벌써 마당에는 농도 짙은 한여름의 햇살이 넘실거린다. 발등에 바랭이를 거느린 옥수숫대에 꽃이 피고 중복을 맞이한 고춧대에 풋고추들이 반들반들 하다. 봄에 씨를 묻고 바지런 떨며 보살피건, 게으르게 두고 보건, 하늘아래선 모든 것이 제 키 높이를 부여받고 함께 자라난다. 무릇 사람의 손으로 많은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눈으로 보자면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는 아무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풀 밑의 작은 생명들을 볼 기회가 있다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야말로 얼마나 보잘 것 없이 초라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화려한 꽃을 피우진 않지만 텃밭은 생명의 축제로 아름답다. 하루 종일 분주한 개미와 참새, 아직 온 마당을 살림터로 삼지 못했지만 부분부분 영토를 차지한 지렁이의 분변토가 제 욕망을 고집스럽게 지키겠다는 중세의 성곽보다 아름답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다. 생명을 잇는 고리에 서로 겸손하게 순응하기 때문이다. 제 종족만 수수만 년 유지하겠다는 욕망을 고수한다면 단 하루도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생명을 내 안에 모시기도 하지만 내 몸도 기꺼이 다른 생명의 먹이로 내어주기 때문에 그들이 공생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치열한 생존을 위해 평생 몸부림을 치지만 필요에 넘치지 않게 취하는 소박함이, 온 누리를 아름답게 지켜내는 보석 같은 처세술이다.

산골에 둥지를 틀고 산 지 벌써 십년, 더불어 살기를 바라며 마음이 분주했지만 늘 삐걱거렸다. 그래도 마음을 도닥거리며 만나는 좋은 사람들의 배려가 커서 산골을 떠나지 않고 아직까지 살고 있다. 스스로 산골에 나를 유배시키고 나니 그런 것쯤은 이제 아무 일도 아니다. 속을 시끄럽게 하는 세상 소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내 피부에 와 닿는 햇살보다 강하지 않으니 넋두리, 푸념이라도 할 수 있어 오히려 자유롭다. 뭇 생령들이 앞마당에서 자리를 다투는 칠월이다. 첫사랑의 입술처럼 나리꽃 몇 송이가 마당가에 뜨겁다. 생명의 아름다움은 늘 살아 움직인다는 데 있는 듯하다. 뽑아도 뽑아도 새로 고개를 내미는 잡초처럼, 살아 봐야 하겠다. 개, 돼지 취급을 받아도 자존감 잃지 않고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폭력에 복수하는 길이 아닐까?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앞마당의 조화를 배운다. 이 땅에 소박한 ‘살림터’ 하나, 더불어 또 일구어 가야겠다. 봄날 씨앗을 땅에 묻는 마음으로 편지를 띄운다. 온갖 뒤척임을 딛고 가을을 기다리는 산골 촌놈의 넋두리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 [편집자] 새 연재 [홍순천의 ‘땅 다지기’]를 시작합니다. 격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