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홍순천)
숲 그늘 속에서 고라니가 비명을 지르는 새벽녘, 꿩이 날갯짓을 시작하며 제 이름을 불러댄다. 노름방에서 밤새 탈탈 털리고 깩깩 가래침을 뱉으며 사립문을 나서는 사내처럼, 허탈하고 억울한 마음에 통곡하는 고라니는 산골의 새벽을 깨운다. 허술하지만 경계를 짓는 사립문은 흙벽에 삶을 담아냈던 어른들의 정서를 촘촘하게 전해준다. 이슬 한 방울 맺히지 않아 메마른 땅에 먼지만 날리는 하지 무렵이다.
하지를 지났지만 감자는 도통 크지 않고 누렇게 말라간다. 캘 시기가 왔으니 그저 알이 더 굵어지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늦게 오시는 장맛비가 갑작스레 땅을 적시기 전에 감자를 캐서 갈무리해야겠다. 올해는 윤달이 오월에 들었다. 해와 달의 주기를 맞추느라 음력에 여분의 달을 끼워 보정하는 윤달은 '여벌 달', '공 달' 혹은 '덤 달'이라고 했다. 공으로 먹는 달이니 탈이 날 법도 하지만 하늘도 모른 체 해주는 기간이라고 했다. 감자를 조금 늦게 캔다고 큰일 나지는 않을 듯하니 조금 더 게으름을 피워볼 요량이다.
윤달은 하늘의 이치를 따져 눈치 보며 조심하던 일들이 모두 해제되는 기간이다. 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손보고 이장(移葬)을 하거나 수의(壽衣)를 만들어 보관해 두기도 했다. 함부로 하면 동티 날 일들이 허용되는 기간이다.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마음 쓰이던 일을 해결하려는 손길이 분주해지는 기간이다. 하늘과 땅의 신이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쉬는 때여서 불경스러운 짓을 해도 벌을 피해 갈 수 있다니, 손보다 마음이 더 바빠지는 사람들도 많다.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세상이 바뀌는 것을 실감한다. 씨앗을 뿌렸다고 바로 싹이 트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을 수는 없지만 공기가 바뀌고 물이 달라졌다. 그 와중에도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허물 감추기에 급하다. 생존 문제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지만 그동안의 일들을 돌이켜보자면 참 염치없고 낯 두꺼운 행태다. 윤달을 맞이했으니 그마저도 용서해야 할까? 어림없는 일이다. 하늘과 땅이 모른척해도 크게 눈뜨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군주의 무한 권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절이 아니다. 자기 욕심만 챙기려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행태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세상이어야 한다.
윤 오월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산소를 정리하자는 약속을 했다. 형제들 간의 일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마음이 바쁘다. 때론 욕심이 눈을 가려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지만 살면서 한 번 겪는 일에 마음이 옹색해지지 말아야겠다. 살고 죽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라 지금 만나는 순간의 일을 감사하게 누릴 수밖에 없다. 지금 만나는 일은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이지. 세월이 지난 뒤에 회한이 남아도 아무 소용없다. 제 것만 지키려 똥줄이 타는 수구들에게는 이번이 기회다. 하늘과 땅이 모른 체 눈감아 줄 때 그동안의 잘못을 다 고백하고 후련하게 남은 인생을 맞이해 볼 일이다.
서툰 솜씨로 사립문을 엮어 적당한 경계와 소통을 만들었던 지혜와 관용이 돋보이는 윤 오월이다. 완벽하게 감춰 홀로 누리려는 욕망은 부질없다. 비가 오기 전에 부실한 감자라도 캐서 삶아야겠다. 포실포실한 감자를 소금에 찍으며 막걸리 몇 순배 나눌 친구들이 그립다. 짝짓기를 끝낸 꾀꼬리가 조용히 날아다니는 숲에는 여름이 짙어간다. 이제 곧 가뭄과, 일찍 찾아온 폭염 또한 지나고 가을이 오겠다.
윤 오월에는 하늘의 눈을 피해 뭔 짓을 할까? 개구쟁이처럼 가슴 설레는 음모가 마음에 가득하다. 오디를 따먹으며 까만 혀를 내밀고 싶은 시절이다. 유월이 간다.

▲윤 오월에 핀 노랑어리연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