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두어 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아동센터에 나가 아이들과 놀다가 온다. 둘러앉아 차를 마시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알아두면 좋겠다 싶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날씨가 좋은 날은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근처 생태공원으로 나가 세월 따라 변해가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오기도 하고 그러다 심심하면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 나를 아이들은 아저씨라고 부른다. 내 신분이 외부강사쯤 되니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게 맞겠지만 그렇게 불리는 게 마뜩치 않아 아이들에게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달라 부탁을 했다. 내 짐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동네 아저씨와 노는 듯이 여기고 편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도 문득 궁금증이 이는 녀석들이 묻고는 한다.
“아저씨는 왜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해요?”
“선생님이 되면 너희들에게 뭐라도 가르쳐줘야 하잖아. 난 가르치는 거 잘 못해. 그냥 같이 노는 거는 할 줄 알지만.”
그렇게 얘길 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해하는 척 한다.
어른들로부터 노는 것과 공부를 엄격히 구분해서 이해하고 행동하게끔 강요받아 온 아이들에게 노는 것, 놀이의 가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건 참 어렵다. 노는 것은 하찮은 짓이고 책상에 앉아 하는 공부만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행위라고 세뇌를 당해온 아이들은 놀면서 어른들의 눈치를 본다. 아니 이미 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그런 아이들에게 “하찮은(?) 놀이 속에서 발견하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라고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시답지 않은 짓이다.
아이들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목적 없이 놀 수 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을까? 그렇게 정신없이 놀다가 어? 하고 깨닫는 게 있다면 좋은 일이고, 놀이 속에서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는 것들로부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질서를 잡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첫눈에 봐도 힘깨나 쓰게 생긴 녀석이 두 살 많은 형과 어우러져 뒹굴며 놀다가 두 살 많은 그 형을 번쩍 들어서 매다 꽂고는 스스로 놀라는 모습을 봤다. 정신없이 놀다가 자기도 모르게 불쑥 솟아오른 자신의 숨겨진 힘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내재된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일과 놀이는 모두 창의적이고 예술적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기인한 불안감일까? 부모들은 아이들이 제멋대로 노는 꼴을 참아내지 못한다. 하찮은 놀이로 시간을 허비하는 게 불안하고 못마땅하다. 그리고 정해진 놀이터를 벗어나거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불안하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감독하고 훈육하는 게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굳게 믿는 부모와 교사들은 기어코 놀이마저 교육의 범주에 넣으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아이들이 멀리 달아나지 못하게 학교와 집안에 잡아두려고 한다. 그래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해서, 언필칭 ‘교육적인’ 장난감을 사서 아이들에게 안기거나 체육관에 보내면서 그들의 창의력과 체력이 쑥쑥 자라나길 기대한다. 심지어는 놀이전문가, 놀이지도자들에게 아이들을 맡겨 교육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교육적 놀이’의 세계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니 재미가 없지... 아! 아이들의 특권이자 신이 내린 선물인 상상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꼬. 이제 우리의 아이들은 노는 것도 피곤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위는 ‘놀이’라 하지 않고 ‘일’이라 한다. 놀이에는 목적이 없다. 교육적 놀이? 세상에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놀이가 어디 있나? 그건 그냥 공부라고 하는 거다. 어쩌다 이만큼 해야지 라는 목표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 목표가 놀이의 재미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아이들의 창의적 본능은 어른들의 간섭이나 교육적 성과 따위의 목적이 끼어들지 않은 상태에서 놀이에 푹 빠져 있을 때 새벽 강가의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삼십 년 넘게 창의성에 대한 연구를 한 사회심리학자 테레사 애머빌은 “창의성을 북돋우려면 외부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쾌활하며 홀가분한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창의성이란)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참신한 작업을 해내는 과정이며 어느 시점에서 사람들이 유용하고 만족스럽다고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가는 건 쉽고 당연한 듯 보이지만 결코 창의적이지는 않다는 거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레시피를 보고 요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스스로 어떤 과제를 정하고 나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모험심, 집중력, 상상력, 협동심... 그래도 힘들 땐 친구나 어른들의 조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아이들은 그들의 과제에 도전한다. 실패한다 해도 내가 할 만큼 했고 옆에서 혀를 차는 사람도 없기에 마음은 홀가분하다. 스스로의 능력을 펼쳐 보이고자 하는 욕구와 창의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다만 그가 처한 환경이 억압적인지 아닌지에 따라 피기도 하고 끝내 피지 못하기도 할 뿐이 아닐까.
참된 놀이의 적
“아이들은 저마다 흥미롭고 놀라우면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경험에 대한 욕구가 있다”(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著, 『길들여지는 아이들』 중).
참된 놀이를 통해 스스로 성장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욕구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도처에 널려있다. 자본주의가 퍼뜨린 온갖 전자기기들과 스마트폰... 이제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 되어 있어 근본적인 대책이 세워지지 않는 한 인간은 호모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게 되었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얹자면 방과 후 이뤄지는 학습과 학원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 누구와 무얼 하며 놀 수 있겠느냐고 아이들이 항의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도 전자기기야 전원을 꺼버리든가 패대기를 쳐버리면 그만이다. 아이들의 참된 놀이의 적중에 정말 어쩔 수 없는, 단연 으뜸을 꼽자면 역시 학교와 부모들이다. 여전히 집단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학교와 오로지 공부만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부모들은 전원을 꺼버릴 수도, 패대기를 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아이들을 통제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세력들에게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들의 타고난 욕구는 가장 큰 골칫거리가 아닐까 싶다. 번뜩이는 상상력과 튼튼한 두 다리로 새로운 놀이거리를 찾아 뛰어다니고픈 아이들을 책상 앞에 주저앉혀 놓고 학습지를 풀게 하는 건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제라도 학교는 엄격하고 지루한 학과수업 시간을 줄이고, 대신 아이들이 ‘흥미롭고 놀라우면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놀이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몸으로 부딪히며 함께 놀려고 해도 같이 놀 친구가 없다. 시간도 없다. 안심하고 놀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기도 힘들다. 그러니 학교가 아이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움직이며 놀 수 있도록, 놀이 속에서 꿈꾸며 성장할 수 있도록 넉넉한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그 시간에 선생님들은? 교무실에서 바둑을 두시든지 차를 마시든지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