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공부를 마치고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직업을 선택한 젊은이가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배웠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그 분야에서 이름을 드높일 꿈에 부푼 자신만만한 그 청년에게 찬물을 끼엊는 충고를 한 적이 있다.
네가 그동안 해왔던 공부, 그리고 그로인해 알게 된 지식에 의지해선 안 돼. 네가 가진 학위가 모든 걸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결국은 남들이 알려준 지식나부랭이에 불과해. 거기에 너를 가두지는 마. 그런 지식이나 학위 따위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려는 너를 위해 세상이 신겨준 신발에 불과해. 진짜 공부는 지금부터야. 진짜 걸음걸이,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 지금부터 너는 걸음마를 시작하는 거야. 어쩌면 네가 배워온 것들,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그럴 수 있겠어?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기 위해 어렵게 자격을 갖추고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디디려고 하는 이 청년은 과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완전하다고 느낄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스피노자가 한 말이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덜 완전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키 재기를 하며 작년보다 한 뼘이나 자란 자신의 키를 보고 행복해 한다. 어떤 젊은이는 몇 달간 열심히 운동을 해서 만들어낸 초콜릿 복근을 친구들에게 내보이며 우쭐해 하기도 한다. 반면에 시시각각 노쇠해지는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다 노인들은 우울해 진다. 사고나 질병으로 멀쩡하던 몸에 장애를 입어 이전에 비해 불완전한 몸을 갖게 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더욱 더 심한 우울을 겪기도 한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이미 최고의 행복감을 느낀 적이 있다. 바로 어머니의 자궁을 찢고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이다. 알을 깨고 나온 새나 곤충들, 씨앗의 두꺼운 벽을 뚫고 나온 풀꽃과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제일 편안하고 완전하고 안전했던 어머니의 자궁을 찢는 그 순간 우리는 이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미증유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알을 깨고 나와 만나게 될 새로운 세상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공포가 훨씬 더 크리라.
그럼에도 모든 생명체는 지금 안주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깨고 나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일까? 가장 편안하고 완전하다고 느끼는 지금의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깨고 나가지 않으면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더 완전한 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혹하게도 자연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그리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매일, 매시간 그 과정은 반복된다. 그것을 우리는 성장이라 부르기도 하고 깨달음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전의 나보다 더 완전한 내가 되어가는 성장의 과정과 배우고 알게 됨으로 얻게 되는 숱한 깨달음의 순간들에서 우리는 환희와 기쁨을 맛본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완전해졌는데 어찌 기쁘고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앞으로 한걸음을 떼기 위해서는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을 벗어나야 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이곳을 벗어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얘기다. 성장과 깨달음, 그로인해 더 완전해진 나와 만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내가 완전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것들, 상식과 관습이라는 지위를 악용해 내 생각을 규정하는 것들, 불가항력이라는 체념으로 나를 주저앉히는 것들...
이 세상은 이렇듯 나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한걸음도 떼지 말고 이 자리에 편안히 있으라고 유혹한다.
사람이기에 살아가면서 오만가지 감정들과 마주치게 된다. 자신이 비루하고 못났다고 느낄 때의 자책감, 하찮은 일 앞에서 쩔쩔맬 때의 수치심, 인간의 탐욕이 불러들인 결과를 바라보며 느꼈던 분노, 시민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국가와 자본의 폭력을 보며 느꼈던 좌절과 슬픔……. 그런 감정들은 마주대하기 참 두려운 것들이다.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거나 내게 유리한 쪽으로 멋대로 해석해 버리기도 한다. 내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들을 똑바로 볼 수 없다면 지금 쓰고 있는 껍질을 벗을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아! 어머니의 자궁을 찢고 나올 때의 그 용기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매일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새로운 인연과 만나고, 새로운 깨달음과 만나는 사람들은 매순간 지금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이다. 완전하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오늘과 작별한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온갖 감정들이 요동을 쳤겠지만 새로운 만남들이 어제보다 나를 완전에 가깝게 해 주리라 믿고 행복하게 해 주리라 믿었으리라. 그런 사람들이었으리라.